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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종(李衍宗)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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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고려후기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승휴(李承休)

[상세내용]

이연종(李衍宗)
생졸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 미상.(아버지 이승휴가 가리이씨의 시조로 여겨지기 때문에 가리이씨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가리이씨 후손들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보기 힘들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9명이 있었다고 한다.)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의 아들이다.

일찍이, 사신(史臣)이 되어 1314년(충숙왕 1) 호군 윤석(尹碩)과 중 계송(戒松)이 왕에게 여자를 들여 폐행(嬖幸)으로 총애를 받아 기강이 문란하여 왕도를 잃었다고 기술하였다.

1321년 사헌규정(司憲糾正)으로 안축(安軸)최해(崔瀣)와 더불어 원나라에 파송되어 과거에 응시하였다.

1349년(충정왕 1) 감찰대부(監察大夫)원나라의 사신 쌍가(雙哥)를 영접하는 연석이 원공주가 남면하고 왕이 동면한 것을 보고 이는 예에 어긋남을 지적하여 왕의 체신을 높이도록 하였다.

1352년(공민왕 즉위)의 개편 때 밀직사 겸 감찰대부(密直使兼監察大夫)에 임명되었다. 찬성사 전윤장(全允藏)이 전날 뇌물을 받고 음사(淫祀)를 행하였음을 들어 파직하라고 탄핵하였다.

또, 종실의 제군(諸君)들이 무위로 녹을 허비함을 정파하게 하였고 왕의 호복과 변발을 파하도록 주청하니, 왕이 즉각 땋은 머리를 풀고 호복을 입지 않으며 오히려 기뻐하고 옷과 요를 하사하였다. 당시에 세인이 “비록 위무(威武)도 그를 극복하지 못하였으니 철석간장(鐵石肝腸)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국내의 실권수뇌인 기원(奇遠)일파는 이제현(李齊賢)조일신(趙日新) 등의 탄핵을 지원하는 처지여서 이연종을 기롱하니, 이를 거부하고 “앞서 조익청(曺益淸)을 탄핵하고 또 이들을 탄핵하면 왕이 누구하고 일을 의논하겠는가?” 하고 나이 70이 넘은 것을 이유로 사직하니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찬성사 조일신이 왕을 시종한 공을 믿고 횡포, 교만하다 하여 감찰집의 김두(金㺶)지평 곽충수(郭忠秀)가 이를 탄핵하였고, 조일신은 가노(家奴)의 일로써 도리어 대관을 고소하니 왕이 김두 등을 정직시킴으로써 전날에 이들이 상사인 자기에게 의논함이 없었음을 혐의하여 김두곽충수, 장령 경천흥(慶千興)을 탄핵하여 저지시켰다.

그러나 다시 조일신이 탄핵당하니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갔으므로, 조일신의 난 때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瀛州李氏大同譜

[집필자]

박천식(朴天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