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손(李德孫)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B355C190D1301X0 |
이명(異名) | 이첩(李帖) |
시호(諡號) | 장숙(莊淑) |
생년 | ?(미상) |
졸년 | 1301(충렬왕 27)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합천(陜川) |
활동분야 | 관료 > 총신 |
부 | 이순목(李淳牧) |
[상세내용]
이덕손(李德孫)
미상∼1301년(충렬왕 27). 고려 충렬왕 때의 폐행(嬖幸). 본관은 합천(陜川).
말년에 이름을 몽고식으로 고쳐 이첩(李帖)이라 하였다. 우복야 한림학사 승지(右僕射翰林學士承旨)를 지낸 이순목(李淳牧)의 아들이며, 형제로는 신손(信孫)‧의손(義孫) 등이 있다.
또한, 아들 설(偰)은 충숙왕 때 찬성사에 올랐으며, 딸은 충렬왕 때의 권신이던 송빈(宋玢)의 아들 인(璘)에게 출가하였다. 처음 관직에 나간 경로는 확인되지 않으나 1268년(원종 9) 임연(林衍) 등이 김준(金俊)을 제거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이후 어사잡단(御史雜端)과 경상‧전라‧충청도의 안찰사(按察使)를 지냈다.
1279년(충렬왕 5)경 판도총랑(版圖摠郞)으로서 동경유수(東京留守)에 부임하였는데, 때마침 일본정벌을 독려하기 위하여 행차하였던 충렬왕에게 공억(供億)을 잘하여 부윤으로 승진하였다.
또한, 1285년 경상도왕지사용별감(王旨使用別監)으로 있으면서 수탈을 과중히 하여 그것으로써 왕의 총애를 얻어 곧 위위윤(衛尉尹)에 초수(超授)되었다.
1291년 내료(內僚)에게 청탁하여 승지가 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곧 서북면지휘사로 나갔다.
그뒤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거쳐 1296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됨으로써 재추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승진을 거듭하여 1300년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으나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찬성사치사(贊成事致仕)로 되었다. 본인과 처 유씨(庾氏)의 묘지명이 남아 있다. 시호는 장숙(莊淑)이다.
말년에 이름을 몽고식으로 고쳐 이첩(李帖)이라 하였다. 우복야 한림학사 승지(右僕射翰林學士承旨)를 지낸 이순목(李淳牧)의 아들이며, 형제로는 신손(信孫)‧의손(義孫) 등이 있다.
또한, 아들 설(偰)은 충숙왕 때 찬성사에 올랐으며, 딸은 충렬왕 때의 권신이던 송빈(宋玢)의 아들 인(璘)에게 출가하였다. 처음 관직에 나간 경로는 확인되지 않으나 1268년(원종 9) 임연(林衍) 등이 김준(金俊)을 제거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이후 어사잡단(御史雜端)과 경상‧전라‧충청도의 안찰사(按察使)를 지냈다.
1279년(충렬왕 5)경 판도총랑(版圖摠郞)으로서 동경유수(東京留守)에 부임하였는데, 때마침 일본정벌을 독려하기 위하여 행차하였던 충렬왕에게 공억(供億)을 잘하여 부윤으로 승진하였다.
또한, 1285년 경상도왕지사용별감(王旨使用別監)으로 있으면서 수탈을 과중히 하여 그것으로써 왕의 총애를 얻어 곧 위위윤(衛尉尹)에 초수(超授)되었다.
1291년 내료(內僚)에게 청탁하여 승지가 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곧 서북면지휘사로 나갔다.
그뒤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거쳐 1296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됨으로써 재추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승진을 거듭하여 1300년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으나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찬성사치사(贊成事致仕)로 되었다. 본인과 처 유씨(庾氏)의 묘지명이 남아 있다. 시호는 장숙(莊淑)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韓國金石文追補(李蘭暎, 中央大學校出版部, 1968)
高麗史節要
韓國金石文追補(李蘭暎, 中央大學校出版部, 1968)
[집필자]
이익주(李益柱)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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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