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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穆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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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이안사(李安社)
생년?(미상)
졸년1274(원종 15)
시대고려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왕실 > 왕족
이양무(李陽茂)
이씨(李氏)
외조부이강제(李康齊)

[상세내용]

목조(穆祖)
미상∼1274년(원종 15).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안사(李安社).

장군 이양무(李陽茂)의 아들이며, 모친은 이씨(李氏)상장군 이강제(李康齊)의 딸이다.

1394년(태조 3) 태조가 4대조를 추존할 때, 덕(德)을 베풀고 의(義)로써 행하였다 하여 목조로 추존하였다. 이성계의 가계가 역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170년(의종 24) 경부터이다.

이때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의 동생 이인(李隣)이색(李穡)이 지은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에 나오는 이성계의 6대조인 것같이 보이므로, 전주이씨 일족은 적어도 무신란 직전부터 무반직에 올라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뒤 1174년(명종 4) 이의방이 피살되자 이인은 낙향하였는데 그의 손자 이안사에 이르러 역사적 인물로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전주의 토호였던 이안사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를 둘러싸고 지주(知州: 知全州事)산성별감(山城別監)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벌을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하여 가솔과 토착인 170여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 이곳에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다투었던 산성별감이었으므로 1290년(충렬왕 16)에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하여 덕원부(德源府), 즉 의주(宜州)로 옮겼다.

이때 그의 휘하에는 전주에서부터 따라온 170여호뿐만 아니라 삼척덕원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서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는데 고려 정부는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의주병마사로 삼았다.

당시 동북면으로 침입하는 몽고군과 대항하여 싸우던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의 무리한 입도작전(入島作戰)으로 주민의 반감을 사서 곤경에 빠져 있던 중 용진현인(龍津縣人) 조휘(趙暉)와 정주인(定州人) 탁청(卓靑)신집평을 살해한 뒤 몽고에 투항하였다. 몽 고는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 탁청천호(千戶)로 삼았다. 이로써 안사가 머무르고 있던 의주는 쌍성총관부에 예속되었고 이안사와 그가 거느린 유리민집단은 원나라의 개원로(開元路)에 편입되어 원나라 장수 산길(散吉)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다.

산길은 이곳에서 점차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이안사를 견제하기 위하여 그를 회유, 의주에서 개원로 난징(南京)오동〔斡東〕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안사고려의 관직을 버리고 투항하여 원나라의 관직을 받은 셈이 되었고, 앞서 쌍성에서 고려를 배반한 조휘탁청과 같은 무리가 되었다.

그뒤 그는 20여년간 오동에 거주하면서 여진족까지 다스리다가 그 세력 기반을 아들 이행리(李行里)에게 넘겼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함흥 서북쪽으로 옮겼다.

[참고문헌]

高麗史
牧隱集
太祖實錄
龍飛御天歌
璿源系譜
高麗末 李成桂의 세력기반(許興植, 歷史와 人間의 對應, 한울, 1984)
李朝の傳說と其の構成(池內宏, 東洋學報 5―2‧3, 1913)

[집필자]

김성준(金成俊)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