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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金澍){1}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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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택보(澤夫)
호(號)농암(籠巖)
시호(諡號)충정(忠貞)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고려후기
본관선산(善山)
활동분야충효열 > 충신
김원로(金元老)
수주김씨(水州金氏)

[상세내용]

김주(金澍)
생졸년 미상. 고려 말기의 충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택보(澤夫), 호는 농암(籠巖).

부친은 예의판서(禮儀判書) 김원로(金元老)이며, 모친은 수주김씨(水州金氏)이다. 김제(金濟)의 아우이다.

고려(高麗) 충신(忠臣)으로 관직이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1392년(공양왕 4)에 하절사명나라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개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 유씨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느니 내가 강을 건너가면 몸둘 곳이 없다.”라는 편지를 쓰고, 또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김양수(金揚燧)라 할 것과 조복(朝服)과 신을 부치니 부인이 죽은 뒤에 합장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후손들은 조복 등 유품을 보낸 날에 제사를 지냈다. 그가 중국에 들어가자 명나라 태조는 그에게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임명하였으나 끝내 사양하므로 평생동안 그에 해당하는 녹(祿)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형초(刑楚)에 살았고, 3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전한다.

1597년(선조 30) 일본으로 파견된 사행(使行)의 막하관으로 수행한 허유성(許惟誠)이 그의 외손이라고 전하며, 명나라 고공(高珙)이 엮은 『병탑유언(炳搨遺言)』에는 그의 자손이 대대로 통주(通州)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798년(정조 22)에 정조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농암일고』 1책이 있다.

[참고문헌]


[집필자]

박성학(朴性學)
대표명김주(金澍){1}
농암(籠巖)

호 : "농암(籠巖)"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