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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영(粲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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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고저(古樗)
호(號)목암(木菴)
시호(諡號)대지(大智)
생년1328(충숙왕 15)
졸년1390(공양왕 2)
시대고려후기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한적(韓績)
청주곽씨(淸州郭氏)
출신지경기도 양주

[상세내용]

찬영(粲英)
1328년(충숙왕 15)∼1390년(공양왕 2). 고려 후기의 고승. 성은 한씨(韓氏). 자는 고저(古樗), 호는 목암(木菴). 경기도 양주 출신. 부친은 사복시직장(司僕寺直長) 한적(韓績)이며, 모친은 청주곽씨(淸州郭氏)이다.

14세에 삼각산 중흥사(重興寺)로 출가하여 보우(普愚)의 제자가 되었으며, 5년 동안 법을 배워 성취한 바가 있었다.

그뒤 정혜국사(淨慧國師)의 가르침을 받고 가지산총림(迦智山叢林)에 참여하여 제2좌(第二座)가 되었으며, 다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수자화상(守慈和尙)을 참배하여 선법(禪法)을 익혔다.

1350년(충정왕 2) 구산선과(九山禪科)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였고, 3년 후 공부선(工夫選)에서 다시 장원으로 합격하여 대흥사(大興寺) 주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주지가 그의 본뜻이 아님을 알고 양주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정진을 계속하였으며, 삼각산에서도 3년 동안 머물렀다.

1359년(공민왕 8) 왕명에 의하여 설법하였고, “승록사(僧錄司)의 일이 중대하니 평범한 승려에게는 맡길 수 없다.”는 왕의 뜻에 따라 양가도승록(兩街都僧錄)이 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 직책을 사양하고 석남사(石南寺)‧월남사(月南寺)‧신광사(神光寺)‧운문사(雲門寺) 등에 머무르며 선법(禪法)을 선양하였다.

1372년 공민왕은 다시 청하여 내원당(內願堂)에 머무르게 하고, 정지원명무애국일선사(淨智圓明無碍國一禪師)라는 법호와 함께 금란가사와 바리, 직접 그린 관음보살도를 하사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죽자 다시 은둔하였으나, 우왕은 가지사(迦智寺)에 머무르게 하고 선교도총섭정지원명묘변무애국일도대선사(禪敎都摠攝淨智圓明妙辯無碍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내렸다.

1377년(우왕 3) 병을 핑계하여 주지직을 고사하고 보개산(寶蓋山)으로 은둔하였으나, 이듬해 왕이 다시 가지사로 불렀으며, 1379년에는 태자산(太子山)에 머무르게 하였다.

1382년 다시 청량산(淸凉山)으로 들어갔으나, 1383년 3월 우왕왕사(王師)로 봉하고 충주 억정사(億政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1384년 스승인 보우화상의 비를 삼각산 중흥사에 세웠으며, 이듬해 왕명에 따라 광명사(廣明寺)로 옮겼다.

1388년(창왕 1) 창왕은 즉위와 함께 왕사의 인장을 보내고 왕사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그해 10월 흥성사(興聖寺)로 옮겨 세 번 사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에도 공양왕이 왕사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억정사로 은둔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이듬해 세상인연이 다한 것을 말하고 열반당(涅槃堂)을 구성하도록 한 뒤, 6월 28일에 문인들을 불러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공양왕지감국사(智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혜월원명(慧月圓明)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1393년(태조 2) 태조는 다시 대지국사(大智國師)라는 시호와 지감원명(智鑑圓明)이라는 탑호를 내리고, 박의중(朴宜中)으로 하여금 비문을 찬하게 하여 억정사에 탑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高麗史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이종익(李鍾益)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