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중(朴宜中)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C758C911B1337X0 |
초명(初名) | 박실(朴實) |
자(字) | 자허(子虛) |
호(號) | 정재(貞齋) |
생년 | 1337(충숙왕 후6) |
졸년 | 1403(태종 3)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밀양(密陽)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박인기(朴仁杞) |
저서 | 『정재일고』 |
[상세내용]
박의중(朴宜中)
1337년(충숙왕 복위 6)∼1403년(태종 3).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허(子虛), 호는 정재(貞齋). 초명은 박실(朴實).
판도총랑(版圖摠郞) 박인기(朴仁杞)의 아들이다.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의직장(典儀直長)으로 등용되었다.
그뒤 헌납(獻納)이 되었고, 우왕 때 문하사인(門下舍人)‧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대사성 등을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그들이 옛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설치한 철령위(鐵嶺衛)의 철폐를 교섭하여 성취하고 돌아와, 그 공으로 창왕 때 공신에 봉하여졌다. 공양왕 때 서운관(書雲觀)에서 이미 개경의 지운(地運)이 다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음양에 의한 지리설의 허황됨을 역설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그뒤 예문관제학 겸 대사성이 되었고, 1392년(태조 1)에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를 수찬할 때,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그 공정성을 기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뒤 검교 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에 이르렀다.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문장이 우아하기로 유명하였다.
저서로는 『정재일고』 3권이 있다.
판도총랑(版圖摠郞) 박인기(朴仁杞)의 아들이다.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의직장(典儀直長)으로 등용되었다.
그뒤 헌납(獻納)이 되었고, 우왕 때 문하사인(門下舍人)‧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대사성 등을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그들이 옛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설치한 철령위(鐵嶺衛)의 철폐를 교섭하여 성취하고 돌아와, 그 공으로 창왕 때 공신에 봉하여졌다. 공양왕 때 서운관(書雲觀)에서 이미 개경의 지운(地運)이 다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음양에 의한 지리설의 허황됨을 역설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그뒤 예문관제학 겸 대사성이 되었고, 1392년(태조 1)에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를 수찬할 때,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그 공정성을 기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뒤 검교 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에 이르렀다.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문장이 우아하기로 유명하였다.
저서로는 『정재일고』 3권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太宗實錄
太祖實錄
太宗實錄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대표명 | 박의중(朴宜中) |
성명 | 박의중(朴宜中) |
성명 : "박의중(朴宜中)"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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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