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왕(忠惠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DA9D61CC655B1315X0 |
이명(異名) | 왕정(王禎) |
이명(異名) | 보탑실리(普塔失里) |
시호(諡號) | 충혜(忠惠) |
생년 | 1315(충숙왕 2) |
졸년 | 1344(충혜왕 후5)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개성(開城) |
활동분야 | 왕실 > 왕 |

모 |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洪氏) |
묘소 | 개성 |

[상세내용]
충혜왕(忠惠王)
1315년(충숙왕 2)∼1344년(충혜왕 복위 5). 고려 제28대 왕. 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년.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왕정(王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 충숙왕의 맏아들이며, 모친은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이다.
비는 원나라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딸인 덕녕공주(德寧公主: 충목왕의 생모)와 찬성사 윤계종(尹繼宗)의 딸 희비 윤씨(禧妃尹氏), 평리(評理) 홍탁(洪鐸)의 딸 화비 홍씨(和妃洪氏), 상인(商人) 임신(林信)의 딸 은천옹주(銀川翁主) 임씨(林氏)가 있다.
1328년 세자로 원나라에 갔다가 1330년에 충숙왕의 전위(傳位)를 받고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1332년 원나라에 의하여 전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였으므로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옹립하려는 조적(曺頔) 등이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복위하였다.
그는 본성이 호협방탕하여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후궁만도 1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기거주(起居注) 이담(李湛)의 충고와 전 군부판서(前軍簿判書) 이조년(李兆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방탕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유신들과 반목이 심하였다.
그는 관제를 개혁하여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을 다시 지공거(知貢擧)로, 정승을 중찬(中贊), 평리를 참리(參理)로 고쳤다.
1331년에는 종래의 은병(銀甁) 통용을 금하고 한개가 오종포(五綜布)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에게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여진‧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 유입한 고려인의 쇄환(刷還)을 요청하였다.
그해 이학도감(吏學都監)을 설치하였으며, 5도에는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1342년에는 식화(殖貨)에 힘써 의성창(義城倉)‧덕천창(德泉倉)‧보흥창(寶興倉)의 포 4만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전포를 열게 하였다.
1343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 사용하였고,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이에 원나라에 가 있던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그곳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림으로써 원나라에 끌려가서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다가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다. 시호는 헌효(獻孝)이고, 원나라의 시호는 충혜이며,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왕정(王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 충숙왕의 맏아들이며, 모친은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이다.
비는 원나라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딸인 덕녕공주(德寧公主: 충목왕의 생모)와 찬성사 윤계종(尹繼宗)의 딸 희비 윤씨(禧妃尹氏), 평리(評理) 홍탁(洪鐸)의 딸 화비 홍씨(和妃洪氏), 상인(商人) 임신(林信)의 딸 은천옹주(銀川翁主) 임씨(林氏)가 있다.
1328년 세자로 원나라에 갔다가 1330년에 충숙왕의 전위(傳位)를 받고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1332년 원나라에 의하여 전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였으므로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옹립하려는 조적(曺頔) 등이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복위하였다.
그는 본성이 호협방탕하여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후궁만도 1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기거주(起居注) 이담(李湛)의 충고와 전 군부판서(前軍簿判書) 이조년(李兆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방탕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유신들과 반목이 심하였다.
그는 관제를 개혁하여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을 다시 지공거(知貢擧)로, 정승을 중찬(中贊), 평리를 참리(參理)로 고쳤다.
1331년에는 종래의 은병(銀甁) 통용을 금하고 한개가 오종포(五綜布)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에게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여진‧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 유입한 고려인의 쇄환(刷還)을 요청하였다.
그해 이학도감(吏學都監)을 설치하였으며, 5도에는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1342년에는 식화(殖貨)에 힘써 의성창(義城倉)‧덕천창(德泉倉)‧보흥창(寶興倉)의 포 4만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전포를 열게 하였다.
1343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 사용하였고,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이에 원나라에 가 있던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그곳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림으로써 원나라에 끌려가서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다가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다. 시호는 헌효(獻孝)이고, 원나라의 시호는 충혜이며,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元史
高麗史節要
元史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대표명 | 충혜왕(忠惠王) |
능호 | 영릉(永陵) |
명 | 보탑실리(普塔失里) |
왕명 | 충혜(忠惠), 충혜왕(忠惠王), 혜목정(惠穆定) |
������ : "���������(���������)"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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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