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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흔(金忻)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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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251(고종 38)
졸년1309(충선왕 1)
시대고려후기
활동분야무신 > 무신
김방경(金方慶)

[상세내용]

김흔(金忻)
1251년(고종 38)∼1309년(충선왕 1). 고려시대의 무신.

부친은 명장이며 명재상이었던 김방경(金方慶)이다. 음서(蔭敍)로 산정도감판관(删定都監判官)을 거쳐 장군이 되었다.

1272년(원종 13) 김방경을 따라 탐라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고 대장군이 된 뒤, 곧 사재경(司宰卿)에 올랐다.

1274년 일본원정 때는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참가하였고, 진주목사를 지냈다.

1277년 북쪽 변방이 소란해지자 출정하였고, 이듬해 김방경이 무고를 입어 대청도(大靑島)로 유배될 때 백령도에 유배되었으나, 충렬왕의 변호로 풀려났다.

1279년(충렬왕 5) 대방공(帶方公) 왕징(王澂)원나라에 갈 때 원부(元傅)의 아들 원정(元貞) 등 의관(衣官) 자제 25인과 함께 뚤루게(禿魯花)로 다녀왔으며, 1282년에도 상장군(上將軍)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원나라에 있을 때 고려사람 유주(庾賙)원나라의 황제에게 고려에 이롭지 못한 일을 건의하자, “너는 금필(黔弼)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니냐? 그런데 본국을 그와같이 파괴하려 하느냐.”고 비난하였다.

1286년 지신사(知申事)로서 삼사사(三司事)가 되었고, 이듬해 동판밀직사사(同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289년 만호(萬戶)로서 조정군(助征軍)을 이끌어 요양행성(遼陽行省)에 갔으며, 동계(東界) 방수군(防戍軍)을 조사하고 합단(合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290년 합단이 쳐들어오자 이를 연기(燕岐)부근에서 격파하고 죽전(竹田)에 이르러 나머지 적들을 소탕하여, 그 공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고 원나라로부터 궁시(弓矢)‧안(鞍)‧옥대(玉帶) 등을 상으로 받았다.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승려 일영(日英)한희유(韓希愈)가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하므로 인후(印侯)와 함께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으나, 마침 원나라에 갔던 충렬왕이 무고임을 밝혀 한희유가 무사히 귀국하여 중용되자 귀국하지 않았다. 한희유가 죽자 연경에서 7년 만에 돌아와,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삼중대광(贊成事咨議都僉議司事三重大匡)이 되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여 이르기를, “대덕(大德) 3년인 1299년에 본국의 무뢰한 무리가 장차 난을 꾀하고자 하거늘, 흔(忻)만호 인후와 더불어 능히 먼저 알고 난을 진정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상(賞)하여 특히 서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버지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에 습봉(襲封)되었다.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인자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문수진(文秀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