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수(崔忠粹)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D5CCDA9C218D1197X0 |
생년 | ?(미상) |
졸년 | 1197(신종 즉위) |
시대 | 고려중기 |
본관 | 우봉(牛峰)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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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 최원호(崔元浩) |
공신호 |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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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최충수(崔忠粹)
미상∼1197년(신종 즉위). 고려의 무신. 본관은 우봉(牛峰).
상장군 최원호(崔元浩)의 아들이며, 충헌(忠獻)의 아우이다.
1196년(명종 26)에 동부녹사(東部錄事)였는데, 비둘기문제로 당시 집권자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지영(至榮)과 일이 벌어져 형 충헌을 설득하여 미타산(彌陀山)별장에서 이의민을 죽이고, 뒤이어 그 일당과 그 여당으로 지목되는 문무관(文武官)을 대량 학살한 뒤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충헌과 함께 그동안 누적된 폐정(弊政)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왕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이 되고 이해 9월에 충헌과 함께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를 낭비한다는 이유로 왕을 창락궁(昌樂宮)에 유폐한 뒤 왕의 아우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맞아 왕(神宗)을 삼았으며, 그 공으로 수성제란공신 삼한정광 중대부 응양군대장군 위위경 지도성사 주국(輸誠濟亂功臣三韓正匡中大夫鷹揚軍大將軍衛尉卿知都省事柱國)이 되었다.
또, 왕의 폐립(廢立)에 앞서 충헌과 함께 중서령(中書令) 두경승(杜景升)을 비롯하여 추밀원부사 유득의(柳得義), 상장군 고안우(高安祐), 대장군 백부공(白富公), 친종장군(親從將軍) 주원적(周元迪) 등 13명과 연담(淵湛) 등 10여명의 중을 귀양보냈다.
태자비를 내쫓고 자기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다가 형 충헌과 충돌해서 각각 군사를 이끌고 싸웠으나 흥국사(興國寺)에서 충헌의 군사에게 패배하였다.
이에 임진강 남쪽에서 다시 거사하려고 장단을 건너서 파평현(坡平縣: 坡州) 금강사(金剛寺)에 이르렀으나 추격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상장군 최원호(崔元浩)의 아들이며, 충헌(忠獻)의 아우이다.
1196년(명종 26)에 동부녹사(東部錄事)였는데, 비둘기문제로 당시 집권자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지영(至榮)과 일이 벌어져 형 충헌을 설득하여 미타산(彌陀山)별장에서 이의민을 죽이고, 뒤이어 그 일당과 그 여당으로 지목되는 문무관(文武官)을 대량 학살한 뒤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충헌과 함께 그동안 누적된 폐정(弊政)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려 왕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이 되고 이해 9월에 충헌과 함께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를 낭비한다는 이유로 왕을 창락궁(昌樂宮)에 유폐한 뒤 왕의 아우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맞아 왕(神宗)을 삼았으며, 그 공으로 수성제란공신 삼한정광 중대부 응양군대장군 위위경 지도성사 주국(輸誠濟亂功臣三韓正匡中大夫鷹揚軍大將軍衛尉卿知都省事柱國)이 되었다.
또, 왕의 폐립(廢立)에 앞서 충헌과 함께 중서령(中書令) 두경승(杜景升)을 비롯하여 추밀원부사 유득의(柳得義), 상장군 고안우(高安祐), 대장군 백부공(白富公), 친종장군(親從將軍) 주원적(周元迪) 등 13명과 연담(淵湛) 등 10여명의 중을 귀양보냈다.
태자비를 내쫓고 자기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다가 형 충헌과 충돌해서 각각 군사를 이끌고 싸웠으나 흥국사(興國寺)에서 충헌의 군사에게 패배하였다.
이에 임진강 남쪽에서 다시 거사하려고 장단을 건너서 파평현(坡平縣: 坡州) 금강사(金剛寺)에 이르렀으나 추격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명 : "충수(忠粹)"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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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