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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태후(恭睿太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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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공예(恭睿)
생년1109(예종 4)
졸년1183(명종 13)
시대고려중기
본관정안(定安)
활동분야왕실 > 비빈
임원후(任元厚)
외조부이위(李瑋)

[상세내용]

공예태후(恭睿太后)
1109년(예종 4)∼1183년(명종 13). 고려 인종의 비. 성은 임씨(任氏). 중서령 임원후(任元厚)의 딸이며,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외손녀이다.

이위는 외손녀 공예태후가 출생하던 날 황색의 기가 중문에 세워져 기 끝이 선경전(宣慶殿)의 치미(鴟尾: 궁정‧성루 등의 대들보 위에 장식한 기와)에 얽혀 나부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15세에 평장사(平章事) 김인규(金仁揆)의 아들 김지효(金之孝)에게 시집가던 날 갑자기 김지효가 병이 나서 죽었으므로 파혼하고 집으로 되돌아왔는데, 이때 점술가가 병을 점치고는 국모가 될 것이라 하였다고 한다.

인종도 이상한 꿈을 꾸고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두 딸을 쫓아버리고 임씨를 맞아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삼았다. 이자겸의 두 딸이 쫓겨난 것은 인종을 해치려는 이자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데 이유가 있었다.

1129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태후가 낳은 의종이 즉위하자 왕태후로 높이고 전(殿)을 후덕(厚德)이라 하였다. 태후는 의종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명종왕충희(王冲曦)신종의 다섯형제와 승경(承慶)덕녕(德寧)창락(昌樂)영화(永和)의 네 공주를 낳았다.

1183년 죽은 뒤 순릉(純陵)에 장사지냈다. 시호는 공예(恭睿)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진성규(秦星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