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적(萬積)
[상세내용]
만적(萬積)
미상∼1198년(고려 신종 1).
1198년(고려 신종 1) 5월에 다른 사노(私奴)들과 함께 개경(開京) 북산(北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公私)의 노예들을 모아 놓고 난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다.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후 노예 출신으로 고관(高官)이 된 사람이 많은 사실을 지적하고, 언제까지나 상전의 채찍 밑에서 고생만 할 것이 아니라 궐기해야 한다고 선동하여 모였던 노예들의 찬성을 얻었다. 그리하여 황지(黃紙) 수천 장을 오려 ‘정(丁)’ 자 모양을 만들어 표지로 한 다음 5월 17일 흥국사(興國寺) 뜰에 모여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이고 뒤이어 각각 자기 주인을 죽인 후 노비의 문적(文籍)을 불살라 없애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일에 모인 수가 몇 백 명에 지니지 않았으므로 다시 21일에 보제사(普濟寺)에 모여 거사하기로 약속했으나 한충유(韓忠愈)의 가노 순정(順貞)이 고변(告變)하여 백여 명의 노예들과 함께 붙잡혀 강물에 던져져 죽었다.
1198년(고려 신종 1) 5월에 다른 사노(私奴)들과 함께 개경(開京) 북산(北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公私)의 노예들을 모아 놓고 난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다.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후 노예 출신으로 고관(高官)이 된 사람이 많은 사실을 지적하고, 언제까지나 상전의 채찍 밑에서 고생만 할 것이 아니라 궐기해야 한다고 선동하여 모였던 노예들의 찬성을 얻었다. 그리하여 황지(黃紙) 수천 장을 오려 ‘정(丁)’ 자 모양을 만들어 표지로 한 다음 5월 17일 흥국사(興國寺) 뜰에 모여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이고 뒤이어 각각 자기 주인을 죽인 후 노비의 문적(文籍)을 불살라 없애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일에 모인 수가 몇 백 명에 지니지 않았으므로 다시 21일에 보제사(普濟寺)에 모여 거사하기로 약속했으나 한충유(韓忠愈)의 가노 순정(順貞)이 고변(告變)하여 백여 명의 노예들과 함께 붙잡혀 강물에 던져져 죽었다.
[참고문헌]
高麗史節要
東史綱目
林下筆記(李裕元)
韓國人名大辭典
東史綱目
林下筆記(李裕元)
韓國人名大辭典
[집필자]
성영애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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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