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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채문(智蔡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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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026(현종 17)
시대고려전기
본관봉주(鳳州)
활동분야무신 > 무신

[상세내용]

지채문(智蔡文)
미상∼1026년(현종 17). 고려의 무신. 봉주지씨(鳳州智氏)의 시조이다.

1010년(현종 1)에 중낭장(中郞將)이 되어 거란이 침입하자 화주(和州)를 중심으로 동북방면을 방비하다가 강조(康兆)가 패전하자 서경(西京)을 구원하기 위하여 시어사(侍御史) 최창(崔昌)과 더불어 강덕진(剛德鎭: 평안남도 성천)에 진을 쳤다.

이때 강조의 패전 때 포로가 되었던 노의(盧顗)를 앞세우고 거란인 유경(劉經)서경에 이르러 항복을 권하니 부류수(副留守) 원종석(元宗奭) 등이 이에 응하려 하자 원종석의 항서(降書)를 가지고 가는 노의를 죽이고 항서를 빼앗아 불태웠다. 그리고 동북면도순검사 탁사정(卓思政)과 합세하여 서경에 들어가 거란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계속되는 거란군의 공격으로 서경이 포위되자 탁사정은 도망하고, 그도 개경으로 빠져나와 서경의 전황을 알렸다. 이에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논의하였으나 강감찬(姜邯贊)은 홀로 왕의 남행(南行)을 주장하니 그가 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 등과 금군(禁軍) 50여인을 거느리고 왕을 호종하였다.

적성현(積城縣: 경기도 연천)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렀을 때 무졸(武卒) 견영(堅英)이 역인(驛人)과 더불어 행궁(行宮)을 범하려고 하는 것을 저지하였고, 창화현(昌化縣: 경기도 양주)에서는 현리(縣吏)가 난을 일으키자 채충순주저(周佇) 등과 함께 왕을 피신시켰으며, 이듬해 광주(廣州)에서는 길이 어긋난 왕후를 요탄역(饒呑驛)에서 찾았다.

이어 양성(陽城: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을 지나 여양현(礪陽縣: 충청남도 홍성군)에 이르렀을 때 왕에게 현안지(玄安之) 등 16인에게 중윤(中尹)을 제수하도록 하여 민심을 수습하게 하였다.

삼례(參禮)에서는 전주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이 왕을 전주에 모셔놓고 호령을 하자 여러 무장들이 이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전주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왕의 신변을 여러 차례 보호하여 나주까지 무사히 호종하였다.

이듬해 거란이 물러난 뒤 공주에서 호종의 공으로 전30결을 받았으며, 1016년 무직(武職)으로서 우상시(右常侍)가 된 뒤 1026년에 상장군 우복야에 올랐다. 현종 때 남행을 호종한 공으로 1031년(덕종 즉위)에 1등공신으로 추록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時代史(金庠基, 東國文化社, 1961)

[집필자]

나각순(羅恪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