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道詵)
[상세내용]
도선(道詵)
827년(흥덕왕 2)∼898년(효공왕 2). 신라말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 성은 김씨(金氏). 영암 출신.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850년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峰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언제나 수백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의 명망을 들은 헌강왕은 궁궐로 초빙하여 법문을 들었다.
72세의 나이로 죽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옥룡사에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을 세웠다. 고려의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다.
또한 의종은 비를 세웠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밀교승려 일행(一行)으로부터 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행은 당나라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의 생졸년은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대에 모순이 있고,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도선은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그뒤부터 도선 하면 비기(祕記), 비기 하면 풍수지리설을 연상할 만큼 도선과 풍수지리설 사이에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도선이 풍수지리설 같은 주술적 언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실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존재로 파악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태조는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조는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민간신앙도 보호하고 육성하면서, 동시에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도선비기』에 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쏟았다.
그는 불교신앙에서 오는 가호의 힘과 함께 참위설에서 얻어지는 힘에 의지함으로써 그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달성하려 하였다. 그래서 「훈요십조」 가운데 제2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정한 자리에 개창한 것이다. 도선은 일찍이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이외 함부로 사원을 세우면 지덕(地德)을 손상하여 국운이 길하지 못하리라. ’고 하였다.
생각컨대, 국왕‧공주‧왕비‧조신들이 서로 원당(願堂)이라 하여 사원을 마음대로 창건한다면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신라 말엽에 사찰을 함부로 이곳 저곳에 세웠기 때문에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경계하여야 한다.” 이와같이, 도선이 산천의 지세를 점쳐서 결정한 자리에 세워진 절이나 탑을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고 하였다. 도선의 저서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도선비기』‧『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850년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峰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언제나 수백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의 명망을 들은 헌강왕은 궁궐로 초빙하여 법문을 들었다.
72세의 나이로 죽자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이 옥룡사에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을 세웠다. 고려의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다.
또한 의종은 비를 세웠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밀교승려 일행(一行)으로부터 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행은 당나라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의 생졸년은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대에 모순이 있고,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도선은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그뒤부터 도선 하면 비기(祕記), 비기 하면 풍수지리설을 연상할 만큼 도선과 풍수지리설 사이에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도선이 풍수지리설 같은 주술적 언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실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존재로 파악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태조는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조는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온 민간신앙도 보호하고 육성하면서, 동시에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도선비기』에 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쏟았다.
그는 불교신앙에서 오는 가호의 힘과 함께 참위설에서 얻어지는 힘에 의지함으로써 그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달성하려 하였다. 그래서 「훈요십조」 가운데 제2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정한 자리에 개창한 것이다. 도선은 일찍이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이외 함부로 사원을 세우면 지덕(地德)을 손상하여 국운이 길하지 못하리라. ’고 하였다.
생각컨대, 국왕‧공주‧왕비‧조신들이 서로 원당(願堂)이라 하여 사원을 마음대로 창건한다면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신라 말엽에 사찰을 함부로 이곳 저곳에 세웠기 때문에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경계하여야 한다.” 이와같이, 도선이 산천의 지세를 점쳐서 결정한 자리에 세워진 절이나 탑을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고 하였다. 도선의 저서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도선비기』‧『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靑鶴集
朝鮮金石總覽 上
道詵(徐景洙, 韓國의 人間像 3, 新丘文化社, 1965)
道詵의 生涯와 羅末麗初의 風水地理說(崔柄憲, 韓國史硏究 11, 1975)
靑鶴集
朝鮮金石總覽 上
道詵(徐景洙, 韓國의 人間像 3, 新丘文化社, 1965)
道詵의 生涯와 羅末麗初의 風水地理說(崔柄憲, 韓國史硏究 11, 1975)
[집필자]
배종호(裵宗鎬)
대표명 | 도선(道詵) |
법명 | 도선(道詵), 도선국사(道詵國師) |
법명 : "도선(道詵)"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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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