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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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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비처마립간(毗處麻立干)
이명(異名)소지왕(炤知王)
생년?(미상)
졸년500(소지마립간 22)
시대신라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왕실 > 왕
선혜부인(善兮夫人)
처부내숙(乃宿)
외조부미사흔(未斯欣)

[상세내용]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미상∼500년(소지마립간 22). 신라 제21대왕. 재위 479∼500년. 일명 비처마립간(毗處麻立干)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자비마립간의 장자로서 모친은 김씨서불한(舒弗邯) 미사흔(未斯欣)의 딸이며, 왕비는 이벌찬(伊伐飡) 내숙(乃宿)의 딸 선혜부인(善兮夫人)이다. 왕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었으며, 스스로 겸손하고 공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고 한다.

487년(소지마립간 9)에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국내의 기간도로인 관도(官道)를 수리하였으며, 490년에는 왕경(王京)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사(市肆)를 열어 사방의 물화(物貨)를 유통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자비왕대의 경주의 방리명(坊里名)확정과 아울러 족제적 성격(族制的性格)이 강하게 남아 있는 육부체제(六部體制)를 개편하여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또한, 소지마립간비열성(比烈城: 지금의 安邊)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날이군(捺已郡: 지금의 榮州) 등지를 순행(巡幸)하여 병사를 위문하고 재해지나 전쟁지역의 주민들을 위로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유식(遊食)하는 백성들을 귀농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왕의 치적은 신라의 대내적 결속력의 강화와 아울러 농업생산력 증대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지마립간대에는 고구려신라의 변경지방을 자주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신라백제와 동맹을 맺거나 혹은 가야와도 연합하여 이하(泥河: 지금의 江陵 南大川)모산성(母山城: 지금의 鎭川?)전투에서 격파하였다.

특히, 493년에 소지마립간백제동성왕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여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뒤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는 신라백제 양국의 공수관계(攻守關係)는 더욱 공고해져 494년의 고구려의 신라침입 때에는 백제가, 495년 고구려의 백제공격 때에는 신라가 각각 구원병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고구려와의 전투과정에서 변경지방의 요충지에는 삼년산성(三年山城: 지금의 報恩) 등을 개축하거나 증축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新羅時代 巡狩의 性格(金瑛河, 民族文化硏究 14, 1979)

[집필자]

김영하(金瑛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