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계자(勿稽子)
[상세내용]
물계자(勿稽子)
생졸년 미상. 신라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때의 지사(志士).
집안이 대대로 한미하였으나 사람됨이 남달리 뛰어나고 어릴 때부터 장한 지조가 있었다.
209년(내해이사금 14) 팔포상국(八浦上國)들이 공모하여 아라가야국(阿羅加耶國: 지금의 咸安지방)을 침범하자, 아라가야국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내해이사금은 왕손 내음(㮈音)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이를 구원하고 8국의 군사를 격퇴시켰다. 이 싸움에서 물계자는 큰 공을 세웠다.
3년 뒤 물계자는 골포(骨浦: 지금의 昌原)‧칠포(柒浦: 지금의 사천군)‧고사포(古史浦: 지금의 고성군)의 세 나라가 신라의 갈화성(竭火城)을 침입하였을 때도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두 차례 모두 공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내음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그 공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계자는 누구를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충정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는 “전일의 포상‧갈화의 싸움은 가히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었는데, 능히 목숨을 내놓고 몸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대하리요.”라 하고, 드디어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메고 사체산(師彘山)으로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고 노래를 지으면서 살았다.
집안이 대대로 한미하였으나 사람됨이 남달리 뛰어나고 어릴 때부터 장한 지조가 있었다.
209년(내해이사금 14) 팔포상국(八浦上國)들이 공모하여 아라가야국(阿羅加耶國: 지금의 咸安지방)을 침범하자, 아라가야국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내해이사금은 왕손 내음(㮈音)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이를 구원하고 8국의 군사를 격퇴시켰다. 이 싸움에서 물계자는 큰 공을 세웠다.
3년 뒤 물계자는 골포(骨浦: 지금의 昌原)‧칠포(柒浦: 지금의 사천군)‧고사포(古史浦: 지금의 고성군)의 세 나라가 신라의 갈화성(竭火城)을 침입하였을 때도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두 차례 모두 공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내음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그 공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계자는 누구를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충정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는 “전일의 포상‧갈화의 싸움은 가히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었는데, 능히 목숨을 내놓고 몸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대하리요.”라 하고, 드디어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메고 사체산(師彘山)으로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고 노래를 지으면서 살았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三國遺事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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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