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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경(金彦卿)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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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신라
활동분야정치 > 정치가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언경(金彦卿)
생졸년 미상. 신라 하대의 정치가‧서예가.

무주(武州) 장사현(長沙縣)의 부수(副守: ‘制守’의 誤記라고 함.)를 지내고 병부시랑전중대감(殿中大監)을 역임하였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역임한 관직으로 보아 육두품 신분으로 여겨진다.

일찍이 장사현부수로 있을 때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당나라에서 귀국하자 헌안왕의 명을 받아 다약(茶藥)을 받들고 가서 그를 맞았으며, 그뒤 체징이 가지산파(迦智山派)를 개창한 후에는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어 사재(私財)로써 철 2천5백근을 사서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일구를 만들어 봉헌(奉獻)하는 등 선종구산 중 가지산파의 후원에 크게 노력하였다.

글씨를 잘 써 당대의 명필로 불렸으며, 특히 행서(行書)에 능했는데 필법은 저수량(褚遂良)을 본받았다고 한다.「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는 김원(金遠)과 함께 두 사람이 쓴 것인데, 처음 김원이 머리에서 7행까지를 해서(楷書)로 쓰고 그만두자 이어서 7행의 선자(禪字)이하를 행서로 썼다.

그 필세는 “철근(鐵筋)과 같고 운치(韻致)가 횡일(橫溢)하는 신품(神品)이다.”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821년(헌덕왕 13) 신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김운경(金雲卿)과 동일인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그런가 하면 김언경김운경은 양자의 활동상황을 감안할 때 별개의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보다는 경명왕비 장사택(長沙宅)의 조부인 이찬(伊飡) 김수종(金水宗) 또는 김수종(金遂宗, 邃宗)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槿域書畵徵(吳世昌)
朝鮮金石總覽 上
韓國의 金石과 書藝(任昌淳, 白山學報 3, 1967)
書藝(任昌淳, 韓國美術全集 11, 1973)
宿衛學生考(申瀅植, 歷史敎育 11‧12 合輯, 1969)
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李基東, 歷史學報 77, 1978)
新羅金入宅考(李基東, 震檀學報 45, 1978)
禪宗九山의 成立과 下代佛敎(崔柄憲,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78)

[집필자]

김동수(金東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