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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圓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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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555(진흥왕 16)
졸년638(선덕여왕 7)
시대신라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출신지경주

[상세내용]

원광(圓光)
555년(진흥왕 16)∼638년(선덕여왕 7)경. 신라의 고승. 성은 박씨(朴氏) 또는 설씨(薛氏). 경주 출신.
1. 가계와 출가
13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30세에 경주 안강의 삼기산(三岐山)에 금곡사(金谷寺)를 창건하고 수도하였다.

34세에 주술을 좋아하는 한 승려가 와서 가까운 곳에 암자를 짓고 2년을 살았는데, 원광이 그 승려의 잘못을 타일렀으나 듣지 않다가 화를 입어 죽었다. 이에 불교공부를 더 깊게 하여 사람들을 제도하겠다고 발심하고 589년(진평왕 11)에 진(陳)나라로 들어갔다.
2. 중국유학과 강설
처음에 중국금릉(金陵) 장엄사(莊嚴寺)에 머무르면서 민공(閔公)의 제자로부터 강의를 들었으며, 그뒤 여러 강석에 다니면서 『성실론(成實論)』『열반경』 등을 공부한 뒤, 오(吳)나라의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서 선정에 힘을 기울였다.

『아함경(阿含經)』을 연구하면서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였으나 많은 수행자들이 찾아와서 강의를 청하였다. 이에 응하여 먼저 『성실론』『반야경(般若經)』을 설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전법(傳法)을 시작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때 남북조(南北朝)로 갈라져 있던 중국수나라에 의하여 통일되었는데, 진나라의 수도인 양도(揚都)에서 전쟁포로로 붙잡혔다가 풀려나 장안의 흥선사(興善寺)로 갔다.

그곳에서는 『섭대승론(攝大乘論)』에 대한 연구가 크게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섭론종(攝論宗)의 논서들을 연구하였다.

이때 그는 이미 중국 불교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설법은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신라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귀국을 자주 청하였으므로 수나라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3. 귀국 후 세속오계 전수
600년에 조빙사(朝聘使) 나마제문(奈麻諸文)대사횡천(大舍橫川)을 따라 귀국하여 유학 전에 머물렀던 삼기산에 머무르면서 임금과 신하들의 두터운 존경을 받으며 대승경전을 강의하였다.

그뒤 가실사(加悉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귀산(貴山)추항(箒項)이 찾아와서 종신토록 지닐 계명(誡銘)을 구하였다.

원광은 그들에게 “불교에는 보살십계가 있지만 신하된 몸으로 능히 지키기 어려우므로 이제 세속오계를 주는 것이니, 첫째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둘째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셋째 친구와 믿음으로 사귀고, 넷째 싸움에 나아가 물러서지 말고, 다섯째 살생을 가려서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 세속오계는 뒤에 화랑의 실천덕목이 되어 신라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데 정신적인 큰 계기를 마련하여주었다.

특히, 살생은 불교이념에 위배되는 조항이지만, 당시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고 백제와 항쟁을 계속하던 신라사회로서는 필요불가결한 행동윤리가 요청되었으며, 이에 따른 그의 현실주의적 불교관의 일단면을 나타내는 것이 되고 있다.
4. 수양제에게 걸사표 작성
608년에는 고구려백제의 끊임없는 침입을 걱정한 왕이 수나라가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쳐달라는 글을 지어줄 것을 그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 양제(煬帝)에게 보냈는데, 양제는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러 왔다.

왕의 명을 받았을 때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남을 없애려는 것은 중이 할 바가 못되지만, 왕의 땅에 살면서 그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으리요.”하며 「걸사표」를 지었다고 한다.

613년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왔을 때 황룡사(皇龍寺)에서 인왕백고좌(仁王百高座)법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최상석에서 법회를 주관하였다.

또한, 왕이 병이 들어 의약으로 고칠 수 없을 때에는 법을 설하고 계를 주어 참회하게 함으로써 병을 치유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수계(授戒)참회의 법으로써 깨우치고자 가서사(嘉栖寺)에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정기적으로 베풀 기금(寶)을 마련하였다. 입적한 나이에 대해서는 99세와 84세의 두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84세 설을 채택하고 있다.
4. 평가
원광의 역사적 위치는 시대를 배경하여 살펴볼 때 크게 세가지 점으로 요약된다.

첫째, 그는 신라의 승려로서 대승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신라에서 강의한 최초의 학승이었다.

저술로서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 3권과 『여래장경소(如來藏經疏)』 1권 등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여래장 사상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래장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둘째, 불교의 토착화에 크게 노력하였다. 재앙을 쫓고 병을 고치는 주술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당시의 주술을 불교의 수계와 멸참(滅懺)의 법으로 대치시킴으로써 불교의 토착화를 꾀하였다. 가서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고, 임금의 병을 수계‧멸참으로 치료한 것 등이 그 일례이다.

셋째,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도 깊은 소양을 쌓아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귀산‧추항 두 사람에게 세속오계를 주고, 진평왕의 명을 받아 「걸사표」를 쓴 것 등이 그러한 면을 입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그의 부도가 명활성의 서쪽에 있는 삼기산 금곡사에 있다고 하였는데, 현재 금곡사지에 있는 폐탑이 그의 부도라는 설도 있다. 제자로는 원안(圓安)이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續高僧傳(道宣)
海東高僧傳(覺訓)

[집필자]

고익진(高翊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