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溫達)
[상세내용]
온달(溫達)
미상∼590년(영양왕 1). 고구려 평원왕 때의 장군.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거리를 다니며 걸식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용모가 파리하고 우스꽝스러워 사람들로부터 ‘바보온달’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울기를 잘하여 바보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내야겠다던 평강왕(평원왕의 일명)의 놀림을 진실로 믿고 온달과의 결합을 고집하다 쫓겨난 평강왕의 공주를 처로 맞아들이면서 가세가 펴지게 되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에는 매년 3월 3일 군신(君臣) 및 5부의 병사 등이 낙랑(樂浪)의 언덕에서 사냥을 하여 이때의 노획물로 천신(天神)과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하는 국가적인 대제전이 있었다.
온달은 여기에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참여하여 뛰어난 사냥솜씨를 발휘하여 왕의 감탄을 샀다.
그뒤 북주(北周) 무제(武帝)군의 요동 지방 침입 때 고구려군의 선봉으로 북주군 격퇴에 대공을 세워 비로소 국왕의 사위임을 공인받고 대형(大兄)이라는 관위를 받음으로써 점차 고구려 지배세력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을 위한 군사의 출정이 있자 그는 자원하여 참전하였으나 아단성(阿旦城: 지금의 峨嵯山城)전투에서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와같이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는 온달의 일대기는 설화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닌 것이기는 하지만, 벽화고분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자체의 자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 6세기단계의 고구려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여러가지 각도에서의 검토가 요청된다.
그의 출신은 고구려 최고지배세력에 속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며, 그렇기 때문에 왕족과의 통혼권 밖에 존재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런데 그가 평강왕의 공주와 혼인할 수 있었고, 나아가서 국왕의 측근세력으로서의 자기위치를 신장시켜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고구려 귀족세력간의 다툼으로 말미암아 고구려 지배질서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거리를 다니며 걸식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용모가 파리하고 우스꽝스러워 사람들로부터 ‘바보온달’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울기를 잘하여 바보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내야겠다던 평강왕(평원왕의 일명)의 놀림을 진실로 믿고 온달과의 결합을 고집하다 쫓겨난 평강왕의 공주를 처로 맞아들이면서 가세가 펴지게 되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에는 매년 3월 3일 군신(君臣) 및 5부의 병사 등이 낙랑(樂浪)의 언덕에서 사냥을 하여 이때의 노획물로 천신(天神)과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하는 국가적인 대제전이 있었다.
온달은 여기에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참여하여 뛰어난 사냥솜씨를 발휘하여 왕의 감탄을 샀다.
그뒤 북주(北周) 무제(武帝)군의 요동 지방 침입 때 고구려군의 선봉으로 북주군 격퇴에 대공을 세워 비로소 국왕의 사위임을 공인받고 대형(大兄)이라는 관위를 받음으로써 점차 고구려 지배세력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을 위한 군사의 출정이 있자 그는 자원하여 참전하였으나 아단성(阿旦城: 지금의 峨嵯山城)전투에서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와같이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는 온달의 일대기는 설화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닌 것이기는 하지만, 벽화고분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자체의 자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 6세기단계의 고구려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여러가지 각도에서의 검토가 요청된다.
그의 출신은 고구려 최고지배세력에 속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며, 그렇기 때문에 왕족과의 통혼권 밖에 존재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런데 그가 평강왕의 공주와 혼인할 수 있었고, 나아가서 국왕의 측근세력으로서의 자기위치를 신장시켜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고구려 귀족세력간의 다툼으로 말미암아 고구려 지배질서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2)
溫達傳의 檢討(李基白, 白山學報 3, 1967)
온달설화의 유형적 성격과 부녀갈등(임재해, 女性問題硏究 11, 1982)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2)
溫達傳의 檢討(李基白, 白山學報 3, 1967)
온달설화의 유형적 성격과 부녀갈등(임재해, 女性問題硏究 11, 1982)
[이미지]
[집필자]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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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