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보장왕(寶藏王)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CF4C7A5C655D0682X0
이명(異名)장()
이명(異名)장()
이명(異名)보장(寶臧)
이명(異名)보장(寶藏)
생년?(미상)
졸년682(신문왕 2)
시대고구려
활동분야왕실 > 왕
태양왕(太陽王)

[상세내용]

보장왕(寶藏王)
미상∼682년(신문왕 2). 고구려 제28대왕이며 마지막 왕. 재위 642∼668년. 이름은 장(臧, 藏) 또는 보장(寶臧)보장(寶藏).
1. 가계
고구려의 왕명은 대부분 시호이나 이 왕은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왕(太陽王)의 아들이다.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하여 왕으로 옹립되었기 때문에 비록 왕위에 있었지만 연개소문의 그늘에 가려 왕으로서의 실권을 가지지는 못했다.
2. 도교진흥책
재위기간중 국내적으로는 천재지변이 잦았고, 643년(보장왕 2)에는 연개소문의 주장에 따라 당나라에 요청하여 도사(道士)를 초빙하는 등 도교진흥책을 썼다. 이에 대하여 고구려 종교계에서 기득권을 가진 불교세력의 반발이 심하였고 보덕(寶德)과 같은 승려는 650년 백제로 망명하기까지 하였다.

당시의 도교진흥책에 대해서는 도교를 숭신하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연개소문의 독재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3. 대외관계
한편, 재위기간중의 국제관계는 즉위초에는 당나라와 표면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사절을 교환하고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태종의 팽창정책으로 말미암아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신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적대관계를 계속하여 자주 신라를 공격했고, 나아가서 백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바다 건너 왜(倭)와의 관계를 재개하여 신라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신라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당나라와 밀착했고, 당나라신라를 두둔하면서 고구려에 대해 신라침공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마침내 당나라와의 관계도 파국에 이르렀다.
4. 대당전쟁
그래서 당 태종은 치밀한 사전준비 끝에 연개소문영류왕 시해를 성토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645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했고, 자신이 진두지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나라안시성 싸움에서 참패하고 말았고, 이후 작전을 바꾸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정면대결을 벌이는 대신 소규모 군대로 고구려 각지를 수시로 침공하여 고구려를 피폐하게 하기도 하고, 647년과 648년에도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고구려 침공에 앞장섰던 태종이 649년에 죽음으로써 당나라와의 관계는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했지만,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고구려 정복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고구려고구려대로 654년에는 거란족을 공격하는가 하면 655년에는 백제와 더불어 신라를 공격하는 등, 당나라와 우호관계에 있던 세력들을 공격하여 당나라 군사를 자극했다.

이 때문에 655년부터 당나라와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고, 660년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다시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여 평양성에까지 침입해온 당군을 물리친 적도 있었다.
5. 내분과 멸망
백제멸망 이후 백제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자 신라당나라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고, 이로 인하여 당나라와의 직접 충돌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663년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어가던 부여풍(扶餘豊: 豊璋이라고도 함.)고구려로 망명함으로써 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데다가,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이듬해인 666년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남생(南生) 형제간의 내분이 일어나 남생당나라로 투항했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신라로 망명하는 등 고구려 지배층내의 분열과 동요가 일어나자, 당나라신라와 연합하여 다시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당나라신라의 군대를 맞아 고구려는 각지에서 분전했지만 패배를 거듭했고 마침내 668년 9월에는 평양성마저 함락당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6. 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당나라로 잡혀갔고, 정치의 책임이 왕에게 있지 않다고 하여 당나라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당나라가 고구려유민과 신라의 치열한 반당운동으로 말미암아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기고 사실상 한반도 지배를 포기한 이듬해인 677년에는 요동지방 전체를 지배하는 요동도독 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에 임명되어 당나라에 잡혀간 많은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당나라가 한반도 포기에 따른 요동지역의 동요를 막기 위해 취한 조처였으나, 요동으로 돌아온 보장왕은 오히려 고구려유민을 규합하고 말갈과 내통하여 고구려부흥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681년 공주(邛州: 四川省 邛峽)로 유배되고 말았으며, 682년경 사망하였다.

죽은 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운구되어, 돌궐 가한(可汗)으로 당나라에 투항한 힐리(頡利)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비를 세웠으며,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되었다. 아들로는 남복(男福, 또는 福男)임무(任武)덕무(德武)안승(安勝) 등이 기록에 보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舊唐書
新唐書
資治通鑑
日本書紀
淵蓋蘇文의 執權과 道敎(李乃沃, 歷史學報 99‧100합집, 1983)
高句麗國遺民反唐分子の處置(日野開三郞, 日野開三郞東洋史學論集 8, 1984)

[집필자]

서영대(徐永大)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