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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생(淵男生)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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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634(영류왕 17)
졸년679(문무왕 16)
시대고구려
활동분야왕실 > 귀족
연개소문(淵蓋蘇文)
묘소낙양(洛陽)

[상세내용]

연남생(淵男生)
634년(영류왕 17)∼679년. 고구려 말기의 귀족.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맏아들이다.

9세에 선인(先人)이 되었고, 15세에는 중리소형(中裏小兄)에 봉해졌다.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이 되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23세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에 임명되었고, 24세에는 장군직을 겸하였다.

28세에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莫離支兼三軍大將軍)이 되었다. 연개소문의 사후인 32세에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군국의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아버지를 이어 대권을 장악한 후,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였다. 이 틈을 타 동생 남산(男産)남건(男建)이 정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한 후,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왕명을 빌려 소환하자, 그는 국내성(國內城)으로 달아났다. 그곳을 중심으로 그의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정부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먼저 오골성(烏骨城)을 치고, 한편으로는 당나라대형(大兄) 불덕(弗德)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그의 당나라에 투항하는 반역과 반란행위에 대하여, 휘하 세력 내부에서 반발이 있었고 이어 중앙정부의 압력이 가해지자, 그는 남으로 내려가 수도를 칠 의도를 버리고 서북 요동방면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리고 대형 염유(冉有)에 이어 아들 헌성(獻誠)당나라에 보내어 거듭 구원을 청하였다.

그러자 당나라계필하력(契苾何力) 등이 이끈 군사를 보내어 그를 돕게 하였다. 그는 휘하의 국내성 등 6개성의 주민과 목저성(木底城)남소성(南蘇城)창암성(倉巖城)당나라 군사에 의하여 공략된 3개성의 백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여 합세하였다.

당나라는 즉시 그를 사지절요동대도독 상주국현토군개국공(使持節遼東大都督上柱國玄菟郡開國公) 식읍 3천호에 봉하고, 고구려 원정군의 향도로서 앞세웠다. 평양성 함락 뒤, 그 공으로 당나라로부터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제수되고 변국공(卞國公) 식읍 3천호에 봉하여졌다.

그뒤 당나라의 수도에서 거주하고 있다가, 당군이 고구려부흥군 및 신라군과의 전쟁에서 패퇴하여 676년 마침내 반도에서 퇴각한 후 재차 기용되었다.

당나라신라 세력의 진출을 저지하고 고구려 유민을 안집하며 가능하면 재차 반도로 진출하기 위하여, 요동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지배력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 한 방책으로서 677년 그를 요동으로 옮겨진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관리로 파견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나라인 당나라를 위하여 일하다가, 679년 안동도호부의 관사에서 46세로 죽었다.

낙양(洛陽)에 묻혔고 그 지역에서 출토된 그의 묘지명(墓誌銘)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舊唐書
新唐書
高句麗泉南生墓誌銘(李蘭暎, 韓國金石文追補, 1968)

[집필자]

노태돈(盧泰敦)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