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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산(淵男産)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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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639(영류왕 22)
졸년702(성덕왕 1)
시대고구려
활동분야왕실 > 귀족
연개소문(淵蓋蘇文)
묘소낙양(洛陽)

[상세내용]

연남산(淵男産)
639년(영류왕 22)∼702년. 고구려 말기의 귀족. 대권력가였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셋째아들이다.

18세에 대형(大兄)이 되어 국정을 주도하는 데 참여하였고, 23세에는 위두대형(位頭大兄)이 되었다.

연개소문이 죽고 맏아들 남생(男生)대막리지(大莫離支)로서 국정을 총괄하게 되자, 남산은 작은 형 남건(男建)과 더불어 큰 형 남생이 지방을 순시하는 틈을 타, 정변을 일으켜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뒤 국내성(國內城)을 중심으로 한 남생의 반란과, 그와 연결된 당나라의 침공으로 안팎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고구려군의 저항을 주도해나갔다.

그러나 평양성이 함락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보장왕과 함께 성문을 열고 나가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그뒤 당나라는 그를 사재소경(司宰小卿)에 봉하였다.

668년(보장왕 27) 이후 당나라의 수도에 끌려가 거주하게 되었고, 작위는 요양군개국공(遼陽郡開國公)에 이르렀으나 종내 울울한 가운데 살아가다가 702년에 죽었다. 낙양(洛陽)에 묻혔고, 그 묘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唐書
高句麗泉男産墓誌銘(李蘭暎, 韓國金石文追補, 1968)

[집필자]

노태돈(盧泰敦)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