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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長壽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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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고거련(高巨連)
이명(異名)고연(高璉)
시호(諡號)강()
생년394(광개토왕 4)
졸년491(장수왕 79)
시대고구려
활동분야왕실 > 왕
묘소장군총(將軍塚)
묘소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

[상세내용]

장수왕(長壽王)
394년(광개토왕 4)∼491년(장수왕 79). 고구려 제20대 왕. 재위 413∼491년.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1. 가계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2. 북위와의 외교관계
재위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한 대중국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남중국에는 한족에 의한 동진(東晉, 317∼420)송(宋, 420∼479)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진에 사절을 파견하여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한 이래, 동진을 이은 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것은 북위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됨에 따라 435년(장수왕 23)에는 북위에 사절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436년 북위의 군대에 쫓긴 북연(北燕)의 왕 풍홍(馮弘)고구려 망명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북위의 풍홍소환요청을 거절한다든지, 466년 북위의 혼인요청을 거절하는 등,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 북위와의 긴장이 고조된 적도 있었고, 440년부터 461까지 20년간 사절의 교환이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북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백제북위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 472년 이후부터는 매년 2차례 이상 사절을 파견하는 등, 북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는 북아시아 유목민족인 유연(柔燕)과도 연결을 가져, 479년에는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일대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의 분할 점령을 꾀하고 거란족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3. 평양천도와 남진정책
이렇듯 장수왕중국 및 북아시아의 여러 세력들과 다각적인 외교를 통하여 서방의 안정을 이룩하였고, 이를 토대로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414년에는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부왕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였고, 427년에는 국내성(國內城: 지금의 輯安縣 通溝)에서부터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평양시가지 동북방 6∼7㎞ 지점에 위치한 大城山城 일대)으로 천도를 단행하여 국내성 일대에 뿌리깊은 기반을 가진 고구려 귀족세력의 약화 및 국가운영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또 평양천도를 계기로 백제신라 방면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55년에는 백제에서 왕이 교체되는 틈을 이용하여 백제를 공격하였고, 475년에는 승려 도림(道琳)을 이용하여 백제의 국력을 피폐하게 한 다음, 왕 자신이 3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그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로 하여금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백제백제와 연결된 왜가 중국 남조에 접근하는 것을 적극 차단하였다.

한편,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417년 신라의 왕위계승분쟁에 개입하여 눌지마립간을 옹립하는 등, 처음에는 우월적인 입장에서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신라백제와의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자 468년에는 신라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며, 481년에는 호명성(狐鳴城: 지금의 경상북도 靑松郡 虎鳴山?) 등 7성을 빼앗고 미질부(彌秩夫: 지금의 흥해)까지 진격하였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는 고구려신라가 적대관계로 돌입하기 직전, 고구려가 아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기에 건립된 것이라 생각된다.
4. 전성기 이룩
이로써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遼河), 동쪽으로는 북간도 혼춘(琿春), 북쪽으로는 개원(開原), 남쪽으로는 아산만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차지하게 되었고, 인구도 약 2세기 전에 비하여 3배로 늘어나는 일대 전성기를 이룩하게 되었다.

491년에 98세로 죽자, 북위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신 고구려왕(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功臣高句麗王)을 추증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북위가 이민족에게 수여한 추증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서 북위장수왕에 대한 평가를 짐작하게 한다.

장수왕의 무덤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중국 길림성 집안현(吉林省輯安縣)에 있는 장군총(將軍塚)으로 비정하는 견해와, 평양 부근에 위치한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으로 비정하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魏書
晉書
南齊書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徐永大, 韓國文化 2, 1981)
長壽王征服地域考(津田左右吉, 朝鮮歷史地理, 1913)
北魏の對外政策と高句麗(三崎良章, 朝鮮學報 102, 1983)
長壽王の東アジア認識(武田幸男, 高句麗史と東アジア, 1989)

[집필자]

서영대(徐永大)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