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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택지적(砂宅智積)

[요약정보]

UCIG002+AKS-KHF_14C0ACD0DDC9C0U9999X0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백제
활동분야관료 > 대신

[상세내용]

사택지적(砂宅智積)
백제 후기의 대성팔족(大姓八族)의 하나였던 사택씨(砂宅氏 또는 沙宅氏, 沙氏로 약칭되기도 함) 출신으로 나지성(奈祗城)을 세력기반으로 하였다. 『일본서기』 고교쿠기(皇極紀) 원년(642) 7월조에 대좌평 지적(智積)이 나오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대좌평 지적사택지적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와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을 종합해 보면, 사택지적은 642년(의자왕 2)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백제로 돌아온 뒤, 654년 노재상(老宰相)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642년에 의자왕이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고명지인(高明之人)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한 정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즉, 강화된 왕권의 대귀족(對貴族) 통제력에 말미암은 것이다. 사택지적비는 그가 만년에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면서 만든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일본서기
백제인명고(이홍식, 서울대학교논문집1, 1954)
사비시대 백제 지배체제의 변천(노중국, 한우근박사 정년기념 사학논총, 1981)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