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상지(黑齒常之)
[상세내용]
흑치상지(黑齒常之)
생졸년 미상. 백제 말기의 장군. 서부출신으로 2품관인 달솔(達率)에 올라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하였다.
7척이 넘는 키에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660년(의장왕 20)에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어 백제가 망하자 부중(部衆)과 더불어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뒤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孝)를 비롯하여 여러 왕자를 사로잡고 당나라 군사를 풀어서 제멋대로 약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가까운 족장 10여명과 반기를 들어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大興)을 근거지로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은 곧 3만명으로 늘어나 한때 소정방의 군사를 물리치고 200여성을 되찾아 기세를 떨쳤다.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간 뒤의 나당연합군으로는 백제유민들이 전개한 광복운동을 막아내기 어려워 새로이 원병을 보내 수륙의 두 길로 공격을 강화하자, 백제유민의 광복운동은 더 버텨나가기 어렵게 되어 수로로 공격한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당나라로 건너간 그는 좌령군원외장군 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徉州刺史)가 되어 토번(吐蕃: 티베트)과 돌궐(突厥)을 치는 데 공을 세워, 그 관직과 신임이 중국사람보다 두터워 벼슬이 연연도대총관 연국공(燕然道大總管燕國公)에까지 이르렀다. ‘국공(國公)’이란 당나라에서 9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던 귀족의 직위 중 세번째로 3,000호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그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통치 때 응양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주흥(周興) 등의 무고로 옥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다. 가족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중녀(中女)로 적혀 있는 낙랑군부인 흑치씨는 중국의 불교미술사에 그 이름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즉, 백제 또는 고구려계의 유장(遺將)으로, 흑치상지의 경우와 같이 당나라에 들어가 군공을 세워 천병중군부사 우오위장군 상주국 준화군 개국공(天兵中軍副使右吾衛將軍上柱國遵化郡開國公)에까지 관위가 올라간 순(珣)의 부인 흑치씨는 706년에 남편 및 그의 가족들과 힘을 합쳐 8세기 전반기의 중국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산시성(山西省) 천룡산(天龍山)의 당대석굴(唐代石窟, 11∼15, 17∼21굴)에 삼세불상(三世佛像)과 제현성(諸賢聖)을 조각하였다.
이 불상조각은 707년에 완성되었고, 이해 10월에 불상이 조각된 사연을 적은 공덕비가 세워져 불교미술 분야 뿐 아니라, 당제국에 있어서 한반도 출신의 유민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7척이 넘는 키에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660년(의장왕 20)에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어 백제가 망하자 부중(部衆)과 더불어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뒤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孝)를 비롯하여 여러 왕자를 사로잡고 당나라 군사를 풀어서 제멋대로 약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가까운 족장 10여명과 반기를 들어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大興)을 근거지로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은 곧 3만명으로 늘어나 한때 소정방의 군사를 물리치고 200여성을 되찾아 기세를 떨쳤다.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간 뒤의 나당연합군으로는 백제유민들이 전개한 광복운동을 막아내기 어려워 새로이 원병을 보내 수륙의 두 길로 공격을 강화하자, 백제유민의 광복운동은 더 버텨나가기 어렵게 되어 수로로 공격한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당나라로 건너간 그는 좌령군원외장군 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徉州刺史)가 되어 토번(吐蕃: 티베트)과 돌궐(突厥)을 치는 데 공을 세워, 그 관직과 신임이 중국사람보다 두터워 벼슬이 연연도대총관 연국공(燕然道大總管燕國公)에까지 이르렀다. ‘국공(國公)’이란 당나라에서 9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던 귀족의 직위 중 세번째로 3,000호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그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통치 때 응양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주흥(周興) 등의 무고로 옥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다. 가족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중녀(中女)로 적혀 있는 낙랑군부인 흑치씨는 중국의 불교미술사에 그 이름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즉, 백제 또는 고구려계의 유장(遺將)으로, 흑치상지의 경우와 같이 당나라에 들어가 군공을 세워 천병중군부사 우오위장군 상주국 준화군 개국공(天兵中軍副使右吾衛將軍上柱國遵化郡開國公)에까지 관위가 올라간 순(珣)의 부인 흑치씨는 706년에 남편 및 그의 가족들과 힘을 합쳐 8세기 전반기의 중국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산시성(山西省) 천룡산(天龍山)의 당대석굴(唐代石窟, 11∼15, 17∼21굴)에 삼세불상(三世佛像)과 제현성(諸賢聖)을 조각하였다.
이 불상조각은 707년에 완성되었고, 이해 10월에 불상이 조각된 사연을 적은 공덕비가 세워져 불교미술 분야 뿐 아니라, 당제국에 있어서 한반도 출신의 유민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新唐書
金石華編(王昶)
天龍山 第21石窟과 唐代碑銘의 硏究(Marylin, M. R., 文明大譯註, 佛敎美術 5, 東國大學校博物館, 1980)
新唐書
金石華編(王昶)
天龍山 第21石窟과 唐代碑銘의 硏究(Marylin, M. R., 文明大譯註, 佛敎美術 5, 東國大學校博物館, 1980)
[집필자]
이용범(李龍範)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