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부여융(扶餘隆)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D80C5ECB96DB0615X0
생년615(무왕 16)
졸년682(신문왕 2)
시대백제
활동분야왕실 > 왕족

[상세내용]

부여융(扶餘隆)
615년(무왕 16)∼682년. 백제의 왕족. 의자왕의 아들이다.

644년(의자왕 4)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660년 7월 백제의 왕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될 때 웅진성(熊津城)으로 도피하여 있다가 결국 신라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해 9월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의자왕 및 왕족‧귀족들과 함께 당의 수도인 뤄양(洛陽)으로 끌려갔다.

백제부흥운동을 종식시킨 후 백제유민들을 안집(安輯)하려는 의 구상에 따라, 663년 9월 당장인 손인사(孫仁師)와 함께 백촌강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때 당은 그에게 광록태부태상원외경(光祿太夫太常員外卿)을 제수하는 동시에, 웅진도독 대방군왕(熊津都督帶方郡王)에 임명하였다. 웅진도독의 자격으로 664년 2월 당장 유인원(劉仁願)이 주재한 가운데 웅령(熊嶺)에서 신라김인문(金仁問)과 서맹(誓盟)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8월에도 유인원 주재로 신라문무왕웅진 취리산(就利山)에서 화친을 서맹한 뒤, 백제고지에 대한 웅진도독부의 지배권을 신라로부터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옛 백제의 귀족‧관료들을 중심으로 1도독부 7주 51현제를 백제고지에 실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취리산서맹 직후 유인원 일행이 으로 돌아가자 그도 신라의 압력을 두려워하여 으로 간 뒤, 다시는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뒤 신라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泗沘城)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함으로써 백제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자, 한반도에서 축출된 웅진도독부는 677년 2월 만주건안고성(建安故城)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백제유민들을 안집하였다.

죽은 뒤 당조정으로부터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추증받았다. 묘지는 중국 허난성 뤄양북망산(北芒山)에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舊唐書
新唐書
資治通鑑
日本書紀
韓國金石全文(許興植, 亞細亞文化社, 1984)
熊津都督府의 支配組織과 對日本政策(李道學, 白山學報 34, 1987)

[집필자]

이도학(李道學)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