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익(趙秉益)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BCD1C775B1832X0 |
생년 | 1832(순조 32)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양주(楊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재순(趙載淳) |
출신지 | 경기도 광주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병익(趙秉益)
1832년(순조 3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경기도 광주 출신. 조재순(趙載淳)의 아들이다.
진사로서 1886년(고종 23)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에 임명되어 옥당에서 호군 신환(申桓) 등의 처벌을 요구하는 연차(聯箚)를 올렸을 때 함께 참가하였다.
1890년 태묘효모전상책보시(太廟孝慕殿上冊寶時) 독금보관(讀金寶官)으로 참례하여 가자(加資)되었다.
이듬해 식년문과에 시관(試官)을 맡았다가 사소한 잘못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방송되었다. 이어 1892년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고, 1900년 정릉‧홍릉의 친제시(親祭時)에 겸장례비서승을 맡았다.
1905년 장례원소경(掌禮院少卿)으로 임명되어 칙임관 4등이 되는 등 왕실의 의례를 맡아 보았다.
진사로서 1886년(고종 23)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에 임명되어 옥당에서 호군 신환(申桓) 등의 처벌을 요구하는 연차(聯箚)를 올렸을 때 함께 참가하였다.
1890년 태묘효모전상책보시(太廟孝慕殿上冊寶時) 독금보관(讀金寶官)으로 참례하여 가자(加資)되었다.
이듬해 식년문과에 시관(試官)을 맡았다가 사소한 잘못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방송되었다. 이어 1892년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고, 1900년 정릉‧홍릉의 친제시(親祭時)에 겸장례비서승을 맡았다.
1905년 장례원소경(掌禮院少卿)으로 임명되어 칙임관 4등이 되는 등 왕실의 의례를 맡아 보았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하원호(河元鎬)
대표명 | 조병익(趙秉益) |
성명 | 조병익(趙秉益) |
성명 : "조병익(趙秉益)"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