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열(沈遠悅)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2ECC6D0C5F4B1792X0 |
자(字) | 조회(祖懷) |
호(號) | 학음(鶴陰) |
생년 | 1792(정조 16) |
졸년 | 1866(고종 3)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청송(靑松)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심노암(沈魯巖) |
모 | 풍양조씨(豊穰趙氏) |
조부 | 심낙수(沈樂洙) |
처 | 안동김씨(安東金氏) |
처부 | 김헌순(金憲淳) |
[관련정보]
[상세내용]
심원열(沈遠悅)
1792년(정조 16)∼1866년(고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조회(祖懷), 호는 학음(鶴陰).
조부는 정조 때 노론 시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과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역임한 통훈대부(通訓大夫) 심낙수(沈樂洙)이다. 심노암(沈魯巖)과 풍양조씨(豊穰趙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부 이래로 노론 시파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였는데, 1801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벽파가 정국을 장악하자 조부 심낙수는 삭탈관직되었고 참봉(參奉)으로 있던 백부 심노숭(沈魯崇)도 경남 기장(機張)으로 유배되는 등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심원열은 1799년(정조 23) 8세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이후 이사질(李思質)의 딸인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1808년(순조 8) 17세에 김헌순(金憲淳)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와 결혼하였고, 19세에는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20세에 부친상을, 그 이듬해에 조모와 아내 김씨의 상을 연이어 당하였는데 이후로 그는 백부인 심노숭을 부친처럼 의지하였다.
그는 1835년(헌종 1) 44세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고, 1838년(헌종 4)에 경조부주부(京兆府主簿)를 거쳐 청양현감(靑陽縣監)에 부임하였으나, 1839년(헌종 5) 48세에 강원도 금성현(金城縣)으로 유배를 갔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850년(철종 1)에 광흥창수(廣興倉守)로 부임하였다. 1852년에 고양군수(高陽郡守), 다음해에 공주판관(公州判官)을 역임하였다. 1855년(철종 6)에 울산부사(蔚山府使)로 임명되었고, 1857년 정월에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8월에 울산(蔚山)으로 유배를 갔다. 1866년(고종 3)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심원열은 주로 시파계열의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그와 교유한 인물들을 보면 김준(金䥧), 권상신(權常愼), 김조순(金祖淳), 서준보(徐俊輔), 김노응(金魯應), 김준연(金駿淵), 이근조(李根祖), 이조영(李祖永), 이경회(李景會), 신석우(申錫愚), 강시영(姜時永), 조익영(趙翼永), 김도희(金道喜), 홍준모(洪俊謨), 조용화(趙容和) 등이다. 이 중에서 김준, 권상신, 김조순 등은 『담정총서(藫庭叢書)』 내의 작가들이며, 이른바 ‘담정그룹’ 문인들과의 이러한 교유가 그의 문학적 노선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심원열은 공맹과 노장의 각 입장을 상호 존중하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하였다. 그는 무격(巫覡)에서 신을 섬기는 것을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치부하지 않고 긍정하였으며, 신상과 신묘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고 민중생활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보였다.
그는 시류 4책, 문류 10책 등 총 15권 14책으로 이루어진 초고본 형태의 『학음산고(鶴陰散稿)』를 저술하였는데, 여러 문체로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다양한 계층을 입전한 인물전이나 민담‧전설을 수용한 야담류 그리고 21명의 조선시대 인물의 특이한 행적을 다룬 「용창총설(榕牕叢說)」 등 소설적 경사가 짙은 작품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작품의 편찬은 『청구야담(靑邱野談)』을 비롯한 3대 야담집 등과 더불어 19세기 초의 문단 경향을 확인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또한 소품문의 특징을 가진 신변잡기적 성향의 작품들도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18세기에 융성한 소품문이 19세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슬하에 심종순(沈鍾舜)과 심종우(沈鍾禹) 두 아들을 두었는데, 심종순은 1891년(고종 28) 신묘증광사마시(辛卯增廣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다.
조부는 정조 때 노론 시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과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역임한 통훈대부(通訓大夫) 심낙수(沈樂洙)이다. 심노암(沈魯巖)과 풍양조씨(豊穰趙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부 이래로 노론 시파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였는데, 1801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벽파가 정국을 장악하자 조부 심낙수는 삭탈관직되었고 참봉(參奉)으로 있던 백부 심노숭(沈魯崇)도 경남 기장(機張)으로 유배되는 등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심원열은 1799년(정조 23) 8세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이후 이사질(李思質)의 딸인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1808년(순조 8) 17세에 김헌순(金憲淳)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와 결혼하였고, 19세에는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20세에 부친상을, 그 이듬해에 조모와 아내 김씨의 상을 연이어 당하였는데 이후로 그는 백부인 심노숭을 부친처럼 의지하였다.
그는 1835년(헌종 1) 44세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고, 1838년(헌종 4)에 경조부주부(京兆府主簿)를 거쳐 청양현감(靑陽縣監)에 부임하였으나, 1839년(헌종 5) 48세에 강원도 금성현(金城縣)으로 유배를 갔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850년(철종 1)에 광흥창수(廣興倉守)로 부임하였다. 1852년에 고양군수(高陽郡守), 다음해에 공주판관(公州判官)을 역임하였다. 1855년(철종 6)에 울산부사(蔚山府使)로 임명되었고, 1857년 정월에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부임하였다가 그해 8월에 울산(蔚山)으로 유배를 갔다. 1866년(고종 3)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심원열은 주로 시파계열의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그와 교유한 인물들을 보면 김준(金䥧), 권상신(權常愼), 김조순(金祖淳), 서준보(徐俊輔), 김노응(金魯應), 김준연(金駿淵), 이근조(李根祖), 이조영(李祖永), 이경회(李景會), 신석우(申錫愚), 강시영(姜時永), 조익영(趙翼永), 김도희(金道喜), 홍준모(洪俊謨), 조용화(趙容和) 등이다. 이 중에서 김준, 권상신, 김조순 등은 『담정총서(藫庭叢書)』 내의 작가들이며, 이른바 ‘담정그룹’ 문인들과의 이러한 교유가 그의 문학적 노선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심원열은 공맹과 노장의 각 입장을 상호 존중하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하였다. 그는 무격(巫覡)에서 신을 섬기는 것을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치부하지 않고 긍정하였으며, 신상과 신묘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고 민중생활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보였다.
그는 시류 4책, 문류 10책 등 총 15권 14책으로 이루어진 초고본 형태의 『학음산고(鶴陰散稿)』를 저술하였는데, 여러 문체로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다양한 계층을 입전한 인물전이나 민담‧전설을 수용한 야담류 그리고 21명의 조선시대 인물의 특이한 행적을 다룬 「용창총설(榕牕叢說)」 등 소설적 경사가 짙은 작품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작품의 편찬은 『청구야담(靑邱野談)』을 비롯한 3대 야담집 등과 더불어 19세기 초의 문단 경향을 확인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또한 소품문의 특징을 가진 신변잡기적 성향의 작품들도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18세기에 융성한 소품문이 19세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슬하에 심종순(沈鍾舜)과 심종우(沈鍾禹) 두 아들을 두었는데, 심종순은 1891년(고종 28) 신묘증광사마시(辛卯增廣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다.
[참고문헌]
恩坡散稿
孝田散稿
弟田散稿
鶴陰散稿
星沙文稿
孝田散稿
弟田散稿
鶴陰散稿
星沙文稿
[집필자]
이관성
대표명 | 심원열(沈遠悅) |
성명 | 심원열(沈遠悅) |
성명 : "심원열(沈遠悅)"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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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