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빈(李悌彬)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81CBE48B1772X0 |
자(字) | 본인(本仁) |
생년 | 1772(영조 48) |
졸년 | 1837(헌종 3)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덕수(德水)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상세내용]
이제빈(李悌彬)
1772년(영조 48)∼1837년(헌종 3).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본인(本仁).
5세에 능히 문사(文詞)를 지을 줄 알았으며, 부모를 사랑하고 웃어른을 존경하는 도리가 어른과 다르지 않았다.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고 가난한 형편에 편모슬하에서 자라게 되자 즉시 궁마(弓馬)를 익혀서 1801년(순조 1)에 무과(武科)에 발탁되었다. 천성이 순효(純孝)하여 모친에게 병이 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드시게 하여 반나절을 더 연명하게 할 수 있었다. 모친상을 당하자 날씨가 궂은 날을 가리지 않고 묘소에서 매일 곡을 하니, 나무꾼이 풀을 베러 와서는 ‘효자가 다녀서 길이 났다’고 할 정도로 정성이 지극하였다. 관직을 역임하였던 세 고을에서 모두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1835년(헌종 1)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 1836년에 통제사(統制使) 임성고(任聖皐)가 이제빈의 죄상을 치계(馳啓)하여, ‘사람들이 왜관(倭館)에 난입하였으니 변방의 금령(禁令)이 해이해진 것은 좌수사인 이제빈이 평소에 신칙하지 않은 죄이므로 묘당이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일전에 도계(道啓)로 판부(判付)한 것이 있으니 논죄하는 것은 보류하라’고 회유(回諭)하였다 한다.
5세에 능히 문사(文詞)를 지을 줄 알았으며, 부모를 사랑하고 웃어른을 존경하는 도리가 어른과 다르지 않았다.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고 가난한 형편에 편모슬하에서 자라게 되자 즉시 궁마(弓馬)를 익혀서 1801년(순조 1)에 무과(武科)에 발탁되었다. 천성이 순효(純孝)하여 모친에게 병이 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드시게 하여 반나절을 더 연명하게 할 수 있었다. 모친상을 당하자 날씨가 궂은 날을 가리지 않고 묘소에서 매일 곡을 하니, 나무꾼이 풀을 베러 와서는 ‘효자가 다녀서 길이 났다’고 할 정도로 정성이 지극하였다. 관직을 역임하였던 세 고을에서 모두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1835년(헌종 1)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 1836년에 통제사(統制使) 임성고(任聖皐)가 이제빈의 죄상을 치계(馳啓)하여, ‘사람들이 왜관(倭館)에 난입하였으니 변방의 금령(禁令)이 해이해진 것은 좌수사인 이제빈이 평소에 신칙하지 않은 죄이므로 묘당이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서 ‘일전에 도계(道啓)로 판부(判付)한 것이 있으니 논죄하는 것은 보류하라’고 회유(回諭)하였다 한다.
[참고문헌]
朝鮮人名辭書
日省錄
日省錄
[집필자]
박연희
대표명 | 이제빈(李悌彬) |
성명 | 이제빈(李悌彬) |
성명 : "이제빈(李悌彬)"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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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