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오(李覲吾)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ADFCC624B1760X0 |
이명(異名) | 이중오(李中吾) |
자(字) | 성응(聖應) |
호(號) | 죽오(竹塢) |
생년 | 1760(영조 36) |
졸년 | 1834(순조 34)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울산(蔚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의창(李宜昌) |
모 | 고성이씨(固城李氏) |
외조부 | 이기(李頎) |
출신지 | 울산 |
저서 | 『죽오유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근오(李覲吾)
1760년(영조 36)∼1834년(순조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울산(蔚山). 초명은 중오(中吾). 자는 성응(聖應), 호는 죽오(竹塢). 울산 출신. 이의창(李宜昌)의 아들이며, 모친은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이기(李頎)의 딸이다.
남용만(南龍萬)의 문하에서 수학, 이정규(李鼎揆)와 교유를 맺고 학문을 강마하였다.
1789년(정조 13)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91년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그뒤 봉상시참봉(奉常寺參奉), 성균관‧교서관 박사, 성균관전적을 역임하였다.
1802년(순조 2) 후릉영(厚陵令)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병조좌랑을 거쳐 1819년에 지평에 이르렀다.
그뒤 관직에서 물러나 양사재(養士齋)를 짓고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경학과 사학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죽오유집』 5권이 있다.
남용만(南龍萬)의 문하에서 수학, 이정규(李鼎揆)와 교유를 맺고 학문을 강마하였다.
1789년(정조 13)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91년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그뒤 봉상시참봉(奉常寺參奉), 성균관‧교서관 박사, 성균관전적을 역임하였다.
1802년(순조 2) 후릉영(厚陵令)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병조좌랑을 거쳐 1819년에 지평에 이르렀다.
그뒤 관직에서 물러나 양사재(養士齋)를 짓고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경학과 사학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죽오유집』 5권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竹塢遺集
竹塢遺集
[집필자]
이동술(李東述)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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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