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지(金敬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ACBDC9C0B1710X0 |
자(字) | 원직(元直) |
호(號) | 집재(執齋) |
생년 | 1710(숙종 36) |
졸년 | 1786(정조 10)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강릉(江陵)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수귀(金壽龜) |
생부 | 김수룡(金壽龍) |
출신지 | 충주 |

[상세내용]
김경지(金敬之)
1710년(숙종 36)∼1786년(정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원직(元直), 호는 집재(執齋). 충주 출신.
부친은 진사 김수룡(金壽龍)이며, 봉사(奉事) 김수구(金壽龜)에게 입양되었고, 윤증(尹拯)의 문인이다.
1753년(영조 29)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와 보안찰방(保安察訪)을 거쳐, 1761년 성균관전적으로 승진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1764년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강원도도사로 나갔다.
1770년 개성경력(開城經歷)이 되어, 풍속을 바로잡고 학교를 중수하여 예속과 교육을 진작시켰다.
또한, 자신의 녹봉을 털어 혼사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1771년 당쟁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그뒤로 노론이 득세하여 벼슬에 나가지 못했는데, 그 자신이 윤증의 문인이었고 또 그의 양부가 윤증을 위한 변무소(辨誣疏)를 올렸기 때문이다.
1786년(정조 10)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노론의 방해로 취임하지 못하고 그해에 죽었다.
학문은 주자학적 전통을 중시하여 사서를 기본으로 하였고, 특히 『중용』에 조예가 깊었다. 일찍이 「성선이기설(性善理氣說)」을 지어 경서의 뜻을 밝힌 것이 많았다.
시문집 6권을 남겼다.
부친은 진사 김수룡(金壽龍)이며, 봉사(奉事) 김수구(金壽龜)에게 입양되었고, 윤증(尹拯)의 문인이다.
1753년(영조 29)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와 보안찰방(保安察訪)을 거쳐, 1761년 성균관전적으로 승진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1764년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강원도도사로 나갔다.
1770년 개성경력(開城經歷)이 되어, 풍속을 바로잡고 학교를 중수하여 예속과 교육을 진작시켰다.
또한, 자신의 녹봉을 털어 혼사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1771년 당쟁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그뒤로 노론이 득세하여 벼슬에 나가지 못했는데, 그 자신이 윤증의 문인이었고 또 그의 양부가 윤증을 위한 변무소(辨誣疏)를 올렸기 때문이다.
1786년(정조 10)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노론의 방해로 취임하지 못하고 그해에 죽었다.
학문은 주자학적 전통을 중시하여 사서를 기본으로 하였고, 특히 『중용』에 조예가 깊었다. 일찍이 「성선이기설(性善理氣說)」을 지어 경서의 뜻을 밝힌 것이 많았다.
시문집 6권을 남겼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耳溪全書
國朝榜目
耳溪全書
國朝榜目
[집필자]
김용조(金容祚)
대표명 | 김경지(金敬之) |
성명 | 김경지(金敬之) |
성명 : "김경지(金敬之)"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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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