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후(金致垕)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E58D6C4B1692X0 |
자(字) | 사중(士重) |
호(號) | 사촌(沙村) |
생년 | 1692(숙종 18) |
졸년 | 1742(영조 18)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청풍(淸風)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태로(金泰魯) |
출신지 | 광주(廣州) |
저서 | 『사촌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치후(金致垕)
1692년(숙종 18)∼1742년(영조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사중(士重), 호는 사촌(沙村). 광주(廣州) 출신.
부친은 김태로(金泰魯)이다.
1714년(숙종 40)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1716년에 동료 유생 80여인과 함께 스승인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하면서 당여를 이끌고 소론(少論)의 파당(派黨)을 만든 윤증(尹拯)의 반도덕적인 죄를 상소하여 규탄하였다.
1722년(경종 2) 영소전참봉(永昭殿參奉)이 되고, 1726년(영조 2)에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그해에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그뒤 승지‧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거쳐, 1730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그해에 영조가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선포한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위도(蝟島)로 유배되었다.
2년 후 풀려나와 1738년에 다시 대사간에 기용되었다.
1742년 경상도관찰사에 이어 정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도중 죽었다.
저서로 『사촌집』이 있다.
부친은 김태로(金泰魯)이다.
1714년(숙종 40)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1716년에 동료 유생 80여인과 함께 스승인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하면서 당여를 이끌고 소론(少論)의 파당(派黨)을 만든 윤증(尹拯)의 반도덕적인 죄를 상소하여 규탄하였다.
1722년(경종 2) 영소전참봉(永昭殿參奉)이 되고, 1726년(영조 2)에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그해에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그뒤 승지‧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거쳐, 1730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그해에 영조가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선포한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위도(蝟島)로 유배되었다.
2년 후 풀려나와 1738년에 다시 대사간에 기용되었다.
1742년 경상도관찰사에 이어 정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도중 죽었다.
저서로 『사촌집』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雲溪漫稿
雲溪漫稿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명 : "치후(致垕)"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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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