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귀징(柳龜徵)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C720ADC0C9D5B1649X0 |
| 자(字) | 중구(仲久) |
| 생년 | 1649(인조 27) |
| 졸년 | 1713(숙종 39) |
| 시대 | 조선중기 |
| 본관 | 문화(文化) |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 부 | 유운뢰(柳霣賚) |

[관련정보]
[상세내용]
유귀징(柳龜徵)
1649년(인조 27)∼1713년(숙종 3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중구(仲久).
판서 유계문(柳季聞)의 8대손이며, 현감 유운뢰(柳霣賚)의 아들이다.
1677년(숙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0년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랑을 거친 뒤 부사에 이르렀다.
평생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청렴강직함이 남보다 뛰어나 말단 지위에 있을 때에도 뇌물을 들고 귀현(貴顯) 집에 출입하는 것을 남부끄럽게 여겼다. 이를 들은 같은 종문(宗門)의 상국(相國) 유상운(柳相運)이 그를 한번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도리어 칭찬을 들었다.
4읍의 수령을 역임할 때 한결같이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임하여 치적이 많았다.
그뒤 관계와 인연을 끊고 빈부득실(貧富得失)에 초월하였다.
판서 유계문(柳季聞)의 8대손이며, 현감 유운뢰(柳霣賚)의 아들이다.
1677년(숙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0년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랑을 거친 뒤 부사에 이르렀다.
평생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청렴강직함이 남보다 뛰어나 말단 지위에 있을 때에도 뇌물을 들고 귀현(貴顯) 집에 출입하는 것을 남부끄럽게 여겼다. 이를 들은 같은 종문(宗門)의 상국(相國) 유상운(柳相運)이 그를 한번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도리어 칭찬을 들었다.
4읍의 수령을 역임할 때 한결같이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임하여 치적이 많았다.
그뒤 관계와 인연을 끊고 빈부득실(貧富得失)에 초월하였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在澗集
在澗集
[집필자]
권인혁(權仁赫)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