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익(吳以翼)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624C774C775B1618X0 |
자(字) | 우서(于敍) |
생년 | 1618(광해군 10) |
졸년 | 1666(현종 7)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나주(羅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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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 오희도(吳希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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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정보]
[상세내용]
오이익(吳以翼)
1618년(광해군 10)∼1666년(현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우서(于敍). 예문관검열 오희도(吳希道)의 아들이다.
1646년(인조 2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52년(효종 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승정원주서를 역임하였는데 어머니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다가 3년상을 마친 뒤 춘추관기주(春秋館記注)에 서임되었다.
또,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에 승임되었으며, 그뒤 병조 겸 지제교(兵曹兼知製敎)‧함평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함평군수로 있을 때 형장을 받은 자의 무고로 초산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 벼슬할 뜻을 버리고 깊은 산속에 서실(書室)을 세우고 석문거사(石門居士)라고 자칭하였다.
성품이 단정하고 깨끗하였고, 학문연구를 잠시도 멈추지 않았으며, 특히 성리서(性理書)를 연구하여 정신수양에 힘썼다.
1646년(인조 2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52년(효종 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승정원주서를 역임하였는데 어머니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다가 3년상을 마친 뒤 춘추관기주(春秋館記注)에 서임되었다.
또,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에 승임되었으며, 그뒤 병조 겸 지제교(兵曹兼知製敎)‧함평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함평군수로 있을 때 형장을 받은 자의 무고로 초산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 벼슬할 뜻을 버리고 깊은 산속에 서실(書室)을 세우고 석문거사(石門居士)라고 자칭하였다.
성품이 단정하고 깨끗하였고, 학문연구를 잠시도 멈추지 않았으며, 특히 성리서(性理書)를 연구하여 정신수양에 힘썼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國朝榜目
[집필자]
김용곤(金鎔坤)
자 : "자서(子舒)"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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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