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탁(崔琢)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D5CD0C1FFFFB1587X0 |
자(字) | 사정(士精) |
생년 | 1587(선조 20) |
졸년 | 1652(효종 3)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최응화(崔應和) |

[관련정보]
[상세내용]
최탁(崔琢)
1587년(선조 20)∼1652년(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정(士精).
현감 최응화(崔應和)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 생원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벼슬을 포기, 유생들과 함께 이이첨(李爾瞻)의 간사함을 논척한 뒤 10여년간 두문불출하였다.
1629년(인조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를 거쳐 박사‧봉상시봉사‧가주서‧형조좌랑‧춘추관기사관‧횡간현감을 역임하였다.
한때 사직하였다가 다시 형조정랑이 되고 이어 인제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상(喪)을 당하여 취임하지 못하였다.
그뒤 전적‧호조좌랑을 거쳐 보령현감이 되었으나 민폐가 심한 토호(土豪)를 장살(杖殺)하여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정당한 처사임이 인정되어 곧 병조정랑이 되고 이어 영광현감으로 나갔다가 사직하였다.
현감 최응화(崔應和)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 생원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벼슬을 포기, 유생들과 함께 이이첨(李爾瞻)의 간사함을 논척한 뒤 10여년간 두문불출하였다.
1629년(인조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를 거쳐 박사‧봉상시봉사‧가주서‧형조좌랑‧춘추관기사관‧횡간현감을 역임하였다.
한때 사직하였다가 다시 형조정랑이 되고 이어 인제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상(喪)을 당하여 취임하지 못하였다.
그뒤 전적‧호조좌랑을 거쳐 보령현감이 되었으나 민폐가 심한 토호(土豪)를 장살(杖殺)하여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정당한 처사임이 인정되어 곧 병조정랑이 되고 이어 영광현감으로 나갔다가 사직하였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人物考
[집필자]
최승희(崔承熙)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