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물(鄭四勿)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C0ACBB3CB1574X0 |
자(字) | 역현(亦顯) |
호(號) | 곤봉(昆峰) |
생년 | 1574(선조 7) |
졸년 | 1649(인조 27)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영일(迎日)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정삼외(鄭三畏) |
모 | 수원김씨(水原金氏) |
외조부 | 김공필(金公弼) |
저서 | 『곤봉집』 |
저서 | 『도통지(道統志)』 |
저서 | 『진방명현록(震方名賢錄)』 |

[상세내용]
정사물(鄭四勿)
1574년(선조 7)∼1649년(인조 2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역현(亦顯), 호는 곤봉(昆峰).
부친은 호조참판 정삼외(鄭三畏)이며, 모친은 수원김씨(水原金氏)로 참봉 김공필(金公弼)의 딸이다.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 등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아버지가 흥해에서 창의(倡義)하자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수합(收合)하는 데 많은 활약을 하였고, 또 화왕산(火旺山)의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하여 많은 의병장들과 동맹하는 데 참가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도 고을사람을 규합하여 창의하였으나 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파하였다.
왜란을 겪은 뒤 학궁(學宮)이 무너지고 기강이 해이하여지자 향리의 유생들과 합의하여 학궁을 세워 사풍(士風)을 진작시켰고, 1643년 경주의 곤계봉(昆季峰) 밑에 정사(精舍)를 지어 이의당(二宜堂)이라 편액하고 아우와 함께 학문을 강론하였다.
뒤에 학행(學行)으로 계공랑(啓功郞)‧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곤봉집』 4권과 『도통지(道統志)』‧『진방명현록(震方名賢錄)』 등이 있다.
부친은 호조참판 정삼외(鄭三畏)이며, 모친은 수원김씨(水原金氏)로 참봉 김공필(金公弼)의 딸이다.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 등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아버지가 흥해에서 창의(倡義)하자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수합(收合)하는 데 많은 활약을 하였고, 또 화왕산(火旺山)의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하여 많은 의병장들과 동맹하는 데 참가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도 고을사람을 규합하여 창의하였으나 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파하였다.
왜란을 겪은 뒤 학궁(學宮)이 무너지고 기강이 해이하여지자 향리의 유생들과 합의하여 학궁을 세워 사풍(士風)을 진작시켰고, 1643년 경주의 곤계봉(昆季峰) 밑에 정사(精舍)를 지어 이의당(二宜堂)이라 편액하고 아우와 함께 학문을 강론하였다.
뒤에 학행(學行)으로 계공랑(啓功郞)‧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곤봉집』 4권과 『도통지(道統志)』‧『진방명현록(震方名賢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昆侖集
[집필자]
박성학(朴性學)
대표명 | 정사물(鄭四勿) |
성명 | 정사물(鄭四勿) |
성명 : "정사물(鄭四勿)"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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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