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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순(辛應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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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희순(希淳)
호(號)성재(省齋)
생년1572(선조 5)
졸년1636(인조 14)
시대조선중기
본관영산(靈山)
활동분야학자 > 유생
신영길(辛永吉)
출신지전라남도 영광(靈光)
저서『성재만록(省齋漫錄)』
저서『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

[상세내용]

신응순(辛應純)
1572년(선조 5)∼1636년(인조 14). 조선 중기 유학자‧의병. 자는 희순(希淳)이고, 호는 성재(省齋)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이며, 출신지는 전라남도 영광(靈光)이다.영산신씨(靈山辛氏) 판서공파(判書公派) 22대손으로 목사(牧使) 신보안(辛保安)의 7세손이고, 부친은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신영길(辛永吉)이다.

신응순은 거업(擧業: 과거 응시)을 위한 공부를 싫어하여 경학(經學)에 열중하였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영광(靈光)으로 침입하자, 향교의 위패‧제기(祭器)를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배에 싣고 안마도(鞍馬島)로 피하여 귀중한 자료들을 보존하였다.

1603년(선조 36)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55위로 합격하였으나, 이후 광해군 조에 인목대비 폐비론이 불거지자 과장(科場)에 나가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곡식 수백 석을 모아 찬조하였고, 1627년(인조 5) 병자호란 때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소모유사(召募有司)로 곡식 3천 석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634년(인조 12)에 군수(郡守) 원두표(元斗杓)의 천거로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아들로 신사효(辛思孝), 신익효(辛益孝), 신흥효(辛興孝)를 두었다.

사후 대마면(大馬面) 남산리에 있는 남강사(南崗祠)에 배향되었다.

그의 문집으로 『성재만록(省齋漫錄)』이 있으며, 그 외 저서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주석을 붙인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 2권이 있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지
영광읍지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