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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상(奉天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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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상지(祥之)
생년?(미상)
졸년1521(중종 16)
시대조선전기
본관하음(河陰)
활동분야문신 > 문신
출신지연안(延安)

[상세내용]

봉천상(奉天祥)
미상∼1521년(중종 1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하음(河陰). 자는 상지(祥之). 연안(延安) 출신.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7년(중종 12) 생원으로서 시정책 10개를 건의하자 중종이 이를 채택하였으며, 조광조 등은 그를 옹호하였고 어떤 이는 시세(時勢)에 영합하는 것이라 하여 논란이 있었으나,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앞서 제향에 쓰는 잣〔海松子〕을 모두 이로 까기 때문에 침이 묻어 불결하였던 것을 그가 비로소 교묘한 쇠집개〔鐵鉗〕를 창안, 제작하여 집개 속에 잣을 넣고 압착하여 까게 한 것이 지금까지 준행되고 있다.

1519년 기묘사화에 조광조의 일당으로 연좌되어 삭탈관직당하고, 고향 배천(白川)으로 가서 있던 중, 다시 안사련(安祀連)의 고변에 의한 신사무옥에 관련되어 좌의정안당(安瑭)과 그의 아들 안처겸(安處謙) 등과 함께 변란을 모의하였다는 죄로 인하여 가산이 적몰되고 능지처참되었다. 인종 때 연좌되었던 처자가 석방되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종호(李棕浩)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