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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녕(李恒寧)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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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소고(小皐)
생년1915
졸년2008
시대항일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법학자

[상세내용]

이항녕(李恒寧)
1915년 7월 25일~2008년 9월 17일. 현대 법학자. 호는 소고(小皐)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출신지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이다.

1934년 서울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와 1940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에 재학하던 중 문학가의 꿈을 품고 소설가 이광수(李光洙)의 집에서 수학하였으나, 1935년 동아일보의 장편소설 공모에 낙선하자 법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9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경상남도 하동(河東)과 창녕(昌寧)의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이후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부산 청룡초등학교와 양산중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1949년에 동아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54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1955년부터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1959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정되었고, 그 해에 제9대 문교부차관에 임명되었다. 1964년 고려대학교 교양학부장이 되었고, 1970년 부산대학교 법학과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홍익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73년 세계평화교수협회 이사장이 되었고,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서화작가협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81년 홍익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고, 1987년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의장을 지냈다. 이후 1990년부터 1998년까지 『세계일보』의 객원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또한 1990년부터 뿌리찾기연합회 회장을 지냈고, 1991년부터 사단법인 대한민국헌정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1998년부터 『세계일보』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그 밖에 서울시교육회 회장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및 안중근의사 사업추진위원회 고문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 말기 군수로 재직한 경력에 대해 일제 강점기의 친일행위로 인정하며 참회하는 수필을 여러 차례 발표하였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당시 논설위원으로 있던 『경향신문』에 「청산곡」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6개월간 연재하였는데, 1991년 『청산에 살리라』로 재출간되었다. 1991년에는 일제 강점기 자신의 첫 부임지였던 경상남도 하동의 한 강연회에서 과거의 과오를 참회하는 심경을 밝히기도 하였다.

법철학 관련 저서로 『법철학개론』(1962)‧『민법학개론』(1962)‧『법철학적 인간학』(1976)‧『우리의 조상』(1980)‧『법률학사전』(1992)‧『현대문명과 대순사상』(2004) 등이 있고, 소설 『교육가족』(1959)‧『청산곡』(1962)‧『사직이유서』(1980)와 수필집 『객설록(客說錄)』(1962)‧『나의 인생관, 작은 언덕에 서서』(1978)‧『낙엽의 자화상』(1975)‧『깨어진 그릇』(1980) 등을 출간하였다.

1972년 국민훈장 목단장을 받았고, 1985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92년 충청문학상 공로상을 받았고, 1995년 경복고동창회 제4회 동문대상을 받았으며, 1995년 제14회 일붕문학상 공로상을 받았다.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재두‧이재환‧이재후‧이재창‧이재원‧이재철이다.

[참고문헌]


[집필자]

차호연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