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대(金成大)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131B300B1907X0 |
생년 | 1907(융희 1) |
졸년 | 1970 |
시대 | 항일기 |
활동분야 | 기술 > 공예가 |
출생지 |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성대(金成大)
1907년∼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인 「양주별산대놀이」 연희 및 가면 제작기능보유자.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서 재산가의 3대독자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농업에 종사하다가 18세 무렵 이창유(李昌裕)로부터 「양주별산대놀이」의 탈제작법과 춤을 배웠다.
이어 1962년 김성태(金星泰)를 다시 사사하여 그로부터 배운대로 탈을 만들었고, 그뒤 연희본을 충실히 채록하여 6‧25사변 이후 거의 인멸되다시피 한 「양주별산대놀이」를 원형대로 복원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964년 12월 「양주별산대놀이」의 가면제작 및 탈춤교습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그뒤에도 가면제작 및 산대놀이 후원자로 활약하였다. 후계자로는 예능보유자인 박교응(朴敎應)과 유경섭(柳敬燮) 등이 있으며, 죽은 뒤 문화재관리국에서 그의 유고를 모아 『양주별산대놀이』를 발간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농업에 종사하다가 18세 무렵 이창유(李昌裕)로부터 「양주별산대놀이」의 탈제작법과 춤을 배웠다.
이어 1962년 김성태(金星泰)를 다시 사사하여 그로부터 배운대로 탈을 만들었고, 그뒤 연희본을 충실히 채록하여 6‧25사변 이후 거의 인멸되다시피 한 「양주별산대놀이」를 원형대로 복원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964년 12월 「양주별산대놀이」의 가면제작 및 탈춤교습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그뒤에도 가면제작 및 산대놀이 후원자로 활약하였다. 후계자로는 예능보유자인 박교응(朴敎應)과 유경섭(柳敬燮) 등이 있으며, 죽은 뒤 문화재관리국에서 그의 유고를 모아 『양주별산대놀이』를 발간하였다.
[참고문헌]
重要無形文化財調查報告書―楊州別山臺놀이―(金成大, 文化財管理局, 1970)
양주별산대놀이(徐淵昊, 文化藝術 103, 文藝振興院, 1986)
양주별산대놀이(徐淵昊, 文化藝術 103, 文藝振興院, 1986)
[집필자]
이보형(李輔亨)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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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