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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유호(都宥浩)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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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905(광무 9)
졸년1982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학자 > 기타
출생지함경남도 함흥
저서『조선원시고고학』

[상세내용]

도유호(都宥浩)
1905년∼1982년. 고고학자. 함경남도 함흥 출생.

광복 이후 북한 고고학 발전에 큰 공적을 남긴 학자이다. 집안은 대대로 함흥에서 살아온 비교적 유복한 가정으로 알려져왔다.

함흥 영신학교와 함흥영생학교 4년을 마치고 1922년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이해 신흥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4년 사직하고,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하여 1929년 졸업하였다. 그해 중국 북경(北京)으로 가서 연경대학문학원(燕京大學文學院)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다가 이듬해 다시 유럽으로 떠났다.

1931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대학에 입학하여 사회철학과 사회사를 공부하였고, 1933년 오스트리아의 빈대학 사학과로 옮겨 고고학을 전공, 1935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뒤 바로 빈대학 선사연구소에 들어가 1939년 귀국할 때까지 고고학과 민속학을 연구하였다. 귀국 후 일제의 탄압으로 아무 일도 못하다가 1942년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서 대학선배인 오카(岡正雄)를 도와 멩힌(Menghin, O.)『Weltgeschichte Der Steinzeit』(Wien, 1931)을 번역하여 『석기시대의 세계사(石器時代の世界史)』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잠시 함흥시립도서관장과 함흥의과대학 강사를 지내다가 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월남하였다.

1946년 공산당에 입당하여 인민당외교부장(人民黨外交部長)과 과학자동맹위원장직을 맡았다가 미군정의 체포령이 내리자 가족과 함께 월북하였다. 평양에서는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와 고고학연구소장, 1949년 조선역사편찬위원회 원시사분과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52년 과학원이 설립되자 물질문화연구소의 초대소장직에 오르고, 1959년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로 개칭된 뒤에도 그대로 소장직을 맡았다. 그가 20년간 평양에서 행한 유적의 발굴조사는 대단한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중요한 유적으로는 1947년 송평동패총, 1949년 안악3호분(冬壽墓)‧나진초도유적, 1950년 용강궁상리유적, 1954년 회령오동유적, 1955년 승호금탄리유적‧강남원암리유적, 1956년 영흥용강리토성‧사리원상매리석 관묘, 1957년 봉산지탑리유적, 1959년 강계공귀리석관묘, 1963년 의주미송리동굴유적‧웅기굴포리 패총 등이 있다.

수많은 유적발굴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발표하는 한편 많은 논문과 저서를 출간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조선의 위치비정설’과 『조선원시고고학』의 출간이다.

광복 이후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위치에 대하여 ‘재만주설(在滿洲說)’과 ‘재평양설(在平壤說)’로 갈리게 되었는데, 이후 약 10여년간 토론을 거듭하면서, 1961년 김석형(金錫亨)을 비롯하여 이지린(李趾麟)임건상(林健相)이상호백남운(白南雲) 등 많은 문헌사가들이 ‘재만 주설’에 동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도유호를 비롯한 황철산(黃鐵山)정찬영(鄭燦永)황욱(黃澳) 등 고고학자들이 주장하는 ‘재평양설’은 점차 소수설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에 개최된 토론회에 이르러는 도유호 등의 ‘재평양설’은 마침내 사라지게 되고, 고조선의 ‘재만주설’ 만이 남아 북한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도유호는 북한학계에서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한편, 1960년 그때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얻은 지식을 토대로 『조선원시고고학』을 출간하였다. 이 책에는 아직 굴포리구석기유적을 발굴조사하기 전이어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유물에 관한 것만 들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원시고고학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그리고 즐문토기유적은 신석기시대, 거석문화유적은 청동기시대, 또 압록강두만강 유역의 유적은 초기철 기시대로 각각 규정하는가 하면, 유적상호간의 관계라든가, 종족의 기원과 구성문제, 편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도가 많았다.

특히, 일본학자들의 금석병용기설을 수정한 것은 가장 큰 공적이라 고 할 수 있다. 이 책과 『지탑리원시유적발굴보고』『궁산원시유적발굴보고』 3책으로 1961년 과학원으로부터 국가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963년 『조선원시고고학』에서 문화의 전파이론을 채용한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위배되는 반동적 이론이라 하여 호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 비판이론이 그대로 북한학계의 기본원칙으로 굳어지게 되자, 도유호와 같은 넓은 시각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고, 대신 편협한 국수주의이론이 원칙화되었다. 결국,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지식사회주의 또는 민족주의자에 가깝다고 하겠다.

1965년 이후 북한학계에서 사라진 그에 대하여 여러 추측이 있지만, 일설에 의하면 백두산 부근의 중학교로 쫓겨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北韓의 考古學-특히 都宥浩의 硏究를 中心으로-(李光麟, 東亞硏究 20, 西江大學校東亞硏究所, 1990)

[집필자]

강인구(姜仁求)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