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동(李相東)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0C1B3D9B1865X0 |
자(字) | 건초(健初) |
호(號) | 만진(晩眞) |
생년 | 1865(고종 2) |
졸년 | 1951 |
시대 | 항일기 |
본관 | 안동(安東) |
활동분야 | 종교 > 기독교인 |


[상세내용]
이상동(李相東)
1865년(고종 2)∼1951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건초(健初), 호는 만진(晩眞).
이상동(李相東)의 형은 이상룡(李相龍)이다.
이상동은 1895년(고종 32)에 의병장 신돌석(申乭錫)의 지휘 아래에서 싸웠는데, 형 이상룡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이루어지자 이상동은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안동지회에 들어가, 국권을 회복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후 장로(長老)가 되어 교회를 건립하는 등 기독교를 전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안동에 있는 한 시장에서 기독교 교인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 일로 체포되어 대구 지방법원에서 2년의 형을 선고 받았다. 1921년 출옥한 뒤에도 기독교 전도와 후진교육을 계속해나갔다. 일본제국주의가 강요한 신사참배(神社參拜)와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을 거부하다가 다시 여러 차례 구속되었다.
이상동(李相東)의 형은 이상룡(李相龍)이다.
이상동은 1895년(고종 32)에 의병장 신돌석(申乭錫)의 지휘 아래에서 싸웠는데, 형 이상룡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이루어지자 이상동은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안동지회에 들어가, 국권을 회복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며, 이후 장로(長老)가 되어 교회를 건립하는 등 기독교를 전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안동에 있는 한 시장에서 기독교 교인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 일로 체포되어 대구 지방법원에서 2년의 형을 선고 받았다. 1921년 출옥한 뒤에도 기독교 전도와 후진교육을 계속해나갔다. 일본제국주의가 강요한 신사참배(神社參拜)와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을 거부하다가 다시 여러 차례 구속되었다.
[참고문헌]
韓國人名大辭典
[집필자]
전혜연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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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