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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홍염(張洪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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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장석산(張石山)
생년1910(융희 4)
졸년1990
시대항일기
활동분야독립운동가

[상세내용]

장홍염(張洪琰)
1910년(융희 4) 12월 24일~1990년 11월 5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장석산(張石山)이다. 본적은 전라남도 목포(木浦)이다.

형은 장병준(張柄俊)‧장병상(張柄祥)이다.

1928년 11월 9일 서울에서 사숙(私塾) 고학당(苦學堂)의 교사 이종률(李鍾律)이 기초한 조선총독부 정책비판격문을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학생들에게 배포하였고,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 때 참여하였다. 신간회 광주지회의 상무간사 장석천(張錫天)이 항일시위를 전국으로 확산할 것을 주장하면서 장홍염(張洪琰)에게 가담할 것을 권유하자 1년 전‘ㄱ 당사건’으로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음에도 서울 시내의 주요 조선인 학교의 학생운동가와 접촉하였다. 이에 1929년 12월 3일 서울의 각 학교 조선인 학생들에게 광주학생들의 시위경위와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이 뿌려졌다. 그 후 각 학교 대표들과 함께 뜻을 모아 1930년 1월 15일 9시를 시작으로 궐기하기로 결의하고 항쟁하였다. 이 일로 퇴학을 당하였고, 이후 중국베이징으로 건너갔다.

베이징[北京]대학 경제과를 3년 수료하였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다니다가 김좌진(金佐鎭) 휘하의 독립군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한국광복군 전남지구대 참모장을 지냈다.

1932년 북경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1948년 제헌 국회의원이 되었다.

정부로부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공훈전자사료관

[집필자]

박근령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