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채(李景采)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C774ACBDCC44B1910X0 |
| 이명(異名) | 이중환(李中煥) |
| 이명(異名) | 이일휘(李一輝) |
| 생년 | 1910(융희 4) |
| 졸년 | 1978 |
| 시대 | 항일기 |
| 활동분야 | 독립운동가 |


[상세내용]
이경채(李景采)
1910년(융희 4) 4월 6일~1978년 3월 26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다른 이름은 이중환(李中煥)‧이일휘(李一輝)이다. 본적은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송정면(松汀面)이다.
광주고등보통학교(光州高等普通學校)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4월 송정면 송정리 일대에서 대한제국의 독립과 민족차별 및 노예교육에 반대하는 내용을 실은 격문을 작성‧인쇄하여 살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른바 ‘이경채(李景采) 항일격문배포 사건’은 같은 해 6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동맹휴교에 들어가는 등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벌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법원으로부터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중국 상해(上海)로 도피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39년 10월 1일부로 중국군 제6전구사령장관(第6戰區司令長官) 사령부 소속의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1991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당시의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光州高等普通學校)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4월 송정면 송정리 일대에서 대한제국의 독립과 민족차별 및 노예교육에 반대하는 내용을 실은 격문을 작성‧인쇄하여 살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른바 ‘이경채(李景采) 항일격문배포 사건’은 같은 해 6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동맹휴교에 들어가는 등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벌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법원으로부터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중국 상해(上海)로 도피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39년 10월 1일부로 중국군 제6전구사령장관(第6戰區司令長官) 사령부 소속의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1991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당시의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이은영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