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철진(金哲鎭)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CCA0C9C4B1905X0
생년1905(광무 9)
졸년1971
시대항일기
활동분야사회 > 사회주의자

[상세내용]

김철진(金哲鎭)
1905년(광무 9)∼1971년.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 본적은 전라남도 목포(木浦)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랐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정치경제과를 다니던 중 중퇴하였다.

귀국한 후 1927년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장‧목포청년동맹 집행위원장‧목포청년회 상무집행위원‧반일통일전선조직인 신간회(新幹會) 목포지회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였다. 또 신간회 목포지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민족적 의식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으며,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당원이 되어 공산청년회 목포야체이카 책임직을 맡아 사회주의사상 전파와 사유제산 반대 및 반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1930년 잡지 『호남평론』 책임자‧목포창고금융회사 감사‧목포양조회사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35년 목포부회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전라남도 도의회 의원에도 선임되었다.

1936년 2월에 개최된 목표 지역 유지 간담회에서 고등보통학교 설립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고 고등보통학교 설립준비위원에 선출되었으며, 3만 원을 학교설립기금으로 내놓았다.

1939년 6월 목포 지역 유지 간담회에서 목포중학원을 상업전수학교로 승격시키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고 일을 추진시키기 위한 비용으로 김성한(金聲根)‧차남진(車南鎭) 등과 함께 2만 7천 원의 기금을 조성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인수한 ‘목포신문’의 명칭을 ‘목포일보’로 바꾸고 사장이 되었다.

1951년 목포상과대학 학장을 지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1927.7.22) 외

[집필자]

박상수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