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공흠(尹公欽)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4ACF5D760B1904X0 |
이명(異名) | 윤이계(尹李契) |
생년 | 1904(광무 8) |
졸년 | ?(미상) |
시대 | 항일기 |
활동분야 | 호국 > 독립운동가 |
출신지 | 평안북도 박천 |
[상세내용]
윤공흠(尹公欽)
1904년∼미상. 독립운동가‧비행사‧정치가. 일명 이계(李契). 평안북도 박천 출신.
일본에서 비행술을 배워 일등비행사가 되었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34년 6월 귀국 후 노동자와 연계하여 공산주의운동을 꾀하였다. 그리고 일본 육군비행기를 도입하여 일본요인을 사살하고, 관청을 폭격하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는바, 이는 중국에 있는 의열단과의 긴밀한 연락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일본과 비행기불하교섭을 하였는데, 이때 내세운 명목은 민간항공사업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수상히 여긴 일본경찰의 조사에 의하여 그가 남경군관학교 출신임이 밝혀져 서울에서 잡혔다. 취조를 받던 중 남경군관학교 동기이며 의열단원인 김찬서(金燦瑞)‧오용성(吳龍成)‧김형렬(金亨烈) 등이 붙잡혀, 일본육군항공기를 불하받아 일제요인을 암살하려 하였음이 밝혀져서, 1934년 11월 동지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광복 후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내고 1952년 11월 재정상에 임명되었다.
1954년 3월 상무상에 임명된 뒤 1956년 4월 당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56년 9월 상무상에서 해임된 뒤 1957년 8월 당중앙위전원회의에서 김일성(金日成)을 비판(8월 종파사건)한 연안파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숙청되었다.
일본에서 비행술을 배워 일등비행사가 되었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34년 6월 귀국 후 노동자와 연계하여 공산주의운동을 꾀하였다. 그리고 일본 육군비행기를 도입하여 일본요인을 사살하고, 관청을 폭격하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는바, 이는 중국에 있는 의열단과의 긴밀한 연락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일본과 비행기불하교섭을 하였는데, 이때 내세운 명목은 민간항공사업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수상히 여긴 일본경찰의 조사에 의하여 그가 남경군관학교 출신임이 밝혀져 서울에서 잡혔다. 취조를 받던 중 남경군관학교 동기이며 의열단원인 김찬서(金燦瑞)‧오용성(吳龍成)‧김형렬(金亨烈) 등이 붙잡혀, 일본육군항공기를 불하받아 일제요인을 암살하려 하였음이 밝혀져서, 1934년 11월 동지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광복 후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내고 1952년 11월 재정상에 임명되었다.
1954년 3월 상무상에 임명된 뒤 1956년 4월 당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56년 9월 상무상에서 해임된 뒤 1957년 8월 당중앙위전원회의에서 김일성(金日成)을 비판(8월 종파사건)한 연안파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숙청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집필자]
강진갑(康鎭甲)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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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