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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세(李光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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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901(광무 5)
졸년1972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평안북도 용천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이광세(李光世)
1901년∼1972년.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용천 출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곳 만세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그해 9월 김동식(金東植)박초식(朴初植)의 권유로 김도원(金道源)조원세(趙元世) 등 13명의 동지와 함께 보합단(普合團)에 가입하여 의주 동암산(東巖山)을 중심으로 하여 소집책으로서 활약하였다.

1919년 11월 용천군 안평동 박초식의 집에서 조원세 등과 일제기관의 파괴를 목적으로 폭탄 11개를 만들어 8개를 보관하였다. 이후 철산문내정(文迺貞)박여청(朴汝靑)정양봉(鄭陽鳳) 등에게서 군자금을 적극 모금하여 1920년 1월 이종영(李鍾榮)김인영(金仁榮) 등에게 제공하였으며, 1920년 8월 선천군 성산사(成山寺)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7명을 사살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관전현독립단(寬甸縣獨立團)과 합류,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단원 김도원이 무장계획단원인 조상백(趙相伯)을 만나 두 단체가 제휴하여 서울에서 군자금을 모금할 것을 결의하자, 보합단의 명의로 서울 운니동 변석연(邊錫淵)앞으로 군자금 3만원을 준비하여두라는 경고장을 발송한 다음, 김도원장정용(張廷鏞)과 같이 서울에 잠입하여 무장계획단 책임자인 이종영과 함께 변석연과 담판하여 군자금을 받기로 약속받았다.

약속된 날 이종영김도원이성규(李成珪)장석두(張錫斗)조상백과 함께 변석연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그의 큰아들 덕영(德永)의 밀고로 미리 잠복하여 있던 일본경찰에 김도원 등은 잡혔으며, 자신은 피신하던 중 종로경찰서원에게 잡혀 숨겨둔 폭탄 8개까지 압수당하였다.

1922년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東亞日報
武裝獨立運動秘史(蔡根植, 大韓民國公報處, 1949)
韓國獨立運動史(愛國同志援護會, 1956)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집필자]

강영철(姜英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