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金尙沃)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0C1C625B1901X0 |
이명(異名) | 김상옥(金尙玉) |
이명(異名) | 김상옥(金相沃) |
생년 | 1901(광무 5) |
졸년 | 1969 |
시대 | 항일기 |
활동분야 | 호국 > 독립운동가 |
출신지 | 평안북도 선천 |
공훈 | 건국훈장 국민장 |
[상세내용]
김상옥(金尙沃)
1901년∼1969년. 독립운동가. 일명 김상옥(金尙玉)‧김상옥(金相沃). 평안북도 선천 출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인 선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평양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그해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였으며, 이 연합회 지령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의주∼선천지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포고문‧경고문‧『독립신문』 등을 각지에 배부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 모금운동에 헌신하던 중 일본경찰에 다시 잡혀 징역 8년의 선고를 받고 서울과 평양에서 복역하였다. 복역 중 일본경찰의 악형으로 등골뼈의 골절상을 입었다.
1928년 출옥한 뒤 동지 백여범(白汝範)과 같이 중국 광둥(廣東)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채원개(蔡元凱)‧강창제(姜昌濟) 등과 같이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29년 흥사단에 가입하였으며, 1930년에는 푸젠성 샤먼시(福建省廈門市)에서 이강(李剛)‧유수인(柳樹仁) 등과 중국학생구국연맹을 결성하여 중국학생들에게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37년 국내 항일공작의 사명을 띠고 대만‧일본을 경유하여 부산에 도착한 뒤 선천(宣川)으로 잠입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수개월간 취조를 받았으나 위기를 모면하여 거주제한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39년 또 다시 국내를 탈출하여 중국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교포들의 귀국편의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귀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인 선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평양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그해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였으며, 이 연합회 지령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의주∼선천지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포고문‧경고문‧『독립신문』 등을 각지에 배부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 모금운동에 헌신하던 중 일본경찰에 다시 잡혀 징역 8년의 선고를 받고 서울과 평양에서 복역하였다. 복역 중 일본경찰의 악형으로 등골뼈의 골절상을 입었다.
1928년 출옥한 뒤 동지 백여범(白汝範)과 같이 중국 광둥(廣東)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채원개(蔡元凱)‧강창제(姜昌濟) 등과 같이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29년 흥사단에 가입하였으며, 1930년에는 푸젠성 샤먼시(福建省廈門市)에서 이강(李剛)‧유수인(柳樹仁) 등과 중국학생구국연맹을 결성하여 중국학생들에게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37년 국내 항일공작의 사명을 띠고 대만‧일본을 경유하여 부산에 도착한 뒤 선천(宣川)으로 잠입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수개월간 취조를 받았으나 위기를 모면하여 거주제한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39년 또 다시 국내를 탈출하여 중국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교포들의 귀국편의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귀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文化社, 1965)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第73回帝國議會說明資料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第73回帝國議會說明資料
[집필자]
신재홍(申載洪)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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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