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봉창(李奉昌)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BD09CC3DB1900X0
생년1900(광무 4)
졸년1932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이진규(李鎭奎)
출신지서울
공훈건국훈장 대통령장

[상세내용]

이봉창(李奉昌)
1900년∼1932년. 독립운동가. 서울 출신. 이진규(李鎭奎)의 아들이다.

서울 용산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본인 과자점의 점원으로 들어갔다.

1918년 용산역 만선철도(滿鮮鐵道)기차운전견습소의 견습생을 지냈다.

1924년 병으로 퇴직하고, 다음해 형 이범태(李範泰)와 같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판(大阪)에서 철공소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기노시타(木下昌藏)로 바꾼 뒤 동경대판 등지를 전전하면서 노동 등의 막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을 품고 방랑생활보다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1년 1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서 큰일을 수행할 것을 다짐하면서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 도착한 즉시 한국인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호소하였다.

민단간부들은 그의 거동이 수상하므로 일단 의심하였으나, 얼마 뒤 김구(金九)가 그의 진의를 알아차리고 장차 큰일을 시킬 수 있다고 믿어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켜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자금이 여의치 못하자, 월급 80원을 받고 일본인 인쇄소의 직공과 악기점의 점원으로 고용되어 착실하게 준비를 진행시켰다.

김구도 군자금모집을 펴던 중 마침 재미동포로부터 자금을 받을 수 있어서 거사를 촉진시켰다. 당시 중국군 대령으로 복무하고 있던 왕웅(王雄), 즉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하여 상해공병창에서 수류탄 1개를 구입하고 김현(金鉉)으로부터 또다시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이 수류탄을 받은 즉시 거사자금 300원을 가지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동생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치고 곧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일본천황 히로히토(裕仁)가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동경 요요키(代代木)연병장에서 관병식을 거행할 때 사쿠라다문(櫻田門)앞에서 관병식을 끝내고 돌아가는 히로히토를 향하여 힘차게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히로히토를 명중시키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다. 그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여주었다. 이의 파문은 의외로 커서 푸저우(福州)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대와 경찰이 국민일보사를 습격, 파괴함과 동시에 중국정부에 엄중 항의하는 등 중일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중국인 자객을 사서 일본 일련종(一蓮宗)의 승려 한 명을 암살하게 하여 이를 빌미로 제1차상해사변(第一次上海事變)을 일으키는 등 그 파급양상은 심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白凡逸志
韓國獨立運動之血史(朴殷植, 維新社, 1920)
抗日殉國義烈士傳(吳在植, 行政新聞社, 1958)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資料韓國獨立運動史 2(秋憲樹, 延世大學校出版部, 1972)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臨政要人評傳(李炫熙, 集文堂, 1986)
千秋義烈尹奉吉(任重彬, 人物硏究所, 1975)
臨政과 李東寧硏究(李炫熙, 一潮閣, 1989)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