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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흡(金泰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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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용업(金龍業)
이명(異名)김화산인(金華山人)
이명(異名)김대은(金大隱)
이명(異名)석대은(釋大隱)
이명(異名)김산태흡(金山泰洽)
호(號)소하(素荷)
생년1899(광무 3)
졸년1989
시대항일기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상세내용]

김태흡(金泰洽)
1899년(광무 3) 4월 4일∼1989년 4월 13일. 일제 강점기 불교인. 호는 소하(素荷)이고, 본명은 김용업(金龍業), 다른 이름은 김화산인(金華山人)‧김대은(金大隱)‧석대은(釋大隱)이고, 창씨 개명한 이름은 김산태흡(金山泰洽)이다. 본적은 서울 서대문구(西大門區)이다.

1905년(광무 9) 심원사에서 출가하였으며, 1918년 법주사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인도철학과 종교학을 공부한 뒤, 1926년 일본대학교 종교과를 졸업하였으며, 1928년에는 일본대학교 고등사범부 국한과를 졸업하였다.

1922년에 일본에서 열린 조선순회 불교강연회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유학생들의 손으로 만들어 낸 『금강저(金剛杵)』의 제1호부터 15호까지의 편집 및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조선으로 돌아와서 중앙교무원의 포교사 1호로 임명되어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3년 2월에는 봉은사 현저동 포교당 포교사로, 1933년 7월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강사로 활동하였다.

1935년부터 1944년까지 『불교시보』를 창간하고 편집과 발행업무를 맡아보면서 조선총독부 황민화 정책의 일환인 심전개발 운동을 홍보하고 보도하였으며, 심전개발과 관련된 강연활동에도 참가하였다. 일본의 전시체제가 본격화되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는 사설‧기고‧강연회 등을 통해 일제의 지원병제와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였고, 내선일체 강화와 황민화운동을 위한 일제의 정책에 협력하였다. 특히 스스로 창씨 개명을 한 뒤 창씨 개명 홍보와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 개발에 적극 나서서 조선 제일의 친일 포교사라는 평을 들었다.

광복 후에는 팔만대장경의 한글 번역에 종사하는 등 저서 활동을 했으며, 101세까지 장수하였다.

[참고문헌]

조선총독부관보(1933.3.20) 등
동아일보(1922.8.23)
불교(1926.8.1)(1928.6.1) 등
불교시보(1935.8.3)(1944.4.15) 등
한국불교인명사전(1993)

[집필자]

문혜경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