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윤형숙(尹亨淑)

[요약정보]

UCIG002+AKS-KHF_23C724D615C219B1898X0
이명(異名)윤혈녀(尹血女)
생년1900(고종 광무 4)
졸년1950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윤치운(尹致雲)
출생지전라남도 여천(麗川) 화양면(華陽面) 창무리(倉武里)
묘소전라남도 여천군 소라면(召羅面) 관기리(館基里)
공훈건국포장

[상세내용]

윤형숙(尹亨淑)
1900년(고종 광무 4) 9월 13일∼1950년 9월 28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전라남도 여천(麗川) 화양면(華陽面) 창무리(倉武里)에서 태어났다.

윤치운(尹致雲)의 3남 2녀 중 장녀이다.

1919년 서울을 기점으로 3‧1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광주(光州)에서도 3월 10일 장날을 기하여 1, 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전라남도 순천(順天)의 성서학원를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여고에 재학 중이던 윤형숙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는데, 당시 시위대의 맨 앞에 서서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이 내리친 칼에 왼팔이 잘리는 부상을 입었다. 그는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4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감옥에 있는 동안 고문으로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다.

감옥을 나와 함경남도 원산(元山) 마루다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요양을 하기 위하여 전라북도 고창(高敞)에 내려왔다. 그는 고창 유치원에서 6년간 강사를 하였으며, 여수 봉산동(鳳山洞)에 봉산교회가 설립되자 전도사로 일하였으며 교회 내 설립된 봉산(鳳山)학원에서 교원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여수제일교회를 거쳐 중앙교회의 전도사로 일하던 중 8‧15해방을 맞았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도사라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붙잡혀 9월 28일 여수시(麗水市) 둔덕동(屯德洞) 과수원에서 손양원(孫良源)목사와 함께 인민군들의 총에 죽음을 당하였다.

결혼을 하지 않아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묘는 전라남도 여천군 소라면(召羅面) 관기리(館基里)에 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여수‧여천향토지
전라남도지

[이미지]

[집필자]

박상수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